마음껏 사랑하기

삶의 마지막 순간에 나는 어떤 이야기를 가장 듣고 싶을까. 병에 걸려 온몸을 파고드는 고통 속에서 마지막임을 직감할 때 가족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듣고 싶을까. 이별을 해야 하는 순간에 당도했을 때, 그때조차도 원망의 소리를 듣거나 그동안 가졌던 모든 미움을 내려놓고 좋은 기억만 가지고 가라고 이야기한다면 너무 슬플 것 같다. 그저 내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라는데, 좋은 기억만 가지고 가라고 명령 아닌 명령을 한다면 떠나는 순간 마음이 더 무거워질 것 같다.


어제 동서에게서 어머니를 호스피스 병원으로 옮겨 드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많이 아프시다는 이야기는 듣긴 했어도 벌써 마지막을 준비해야 하는 순간이 된 건가 싶어 마치 나의 엄마가 아픈 듯 가슴이 떨려왔다. 올해 초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으신 동서의 어머니는 집과 병원을 오가며 항암치료를 받으셨다. 그때마다 동서가 어머니를 병원에 모셔다 드리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고. 동서는 어머니에게 "엄마, 그동안 아빠를 많이 원망했겠지만 나에겐 좋은 아빠였어. 아빠를 원망하는 마음은 놔두고 좋은 기억만 가져"라고 말씀드렸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은 순간 나는, 많은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내가 아무리 어머니와 이별해야 하는 슬픔을 이해한다 해도 그 입장이 돼보지 않아서 괜한 상처를 줄까 싶었다.


'그동안 고맙고 사랑했어. 내 엄마가 되어 주어서, 엄마의 딸로 살 수 있어서 행복했고 감사했어.'


만약 내가 생을 마감하고 딸과 이별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가장 듣고 싶은 말이 뭘까 생각해 봤다. 그때 내 가슴을 울려온 한마디이다. 떠나갈 내게 마지막 순간에 구구절절이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이야기한다면 내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이 아니라, 무거운 돌 하나를 내 가슴에 심은 것 같은 느낌이 들 것 같다. 내 마음은 오로지 내 것인데 마음대로 풀어놓지 못한다면, 공감받지 못해 그동안 살아온 삶이 헛되었다고 자책할 것 같다. 자식이 부모의 삶을 다 알 수 있거나 이해할 순 없겠지만 동서가 어머니에게 했던 좋은 기억만 가지라는 말은 자신의 마음이 편해지기 위해 했던 말이 아니었을까.




가끔, 아니 자주 남편과 대화를 하다 보면 소통이 되지 않아 답답할 때가 많다. 자신의 생각만을 이야기하고 강요할 때 남편의 진짜 마음이 무엇인지 헷갈린다. 우리를 걱정해서 하는 말인지, 본인의 생각이 전달되지 않아서 화를 내는 것인지 모르겠다. 코로나19가 재확산되고 있어 남편의 걱정은 말도 안 되게 불어났다. 실내는 절대 들어가선 안된다는 남편만의 철칙이 있고 그걸 나와 아이들에게 강요?를 한다. 언니와 조카가 오랜만에 우리 집에 놀러 왔을 때 함께 집에서 가까운 쇼핑몰에 갔다 왔을 때 남편은 머리끝까지 화가 나 심장을 파고드는 온갖 말들을 퍼부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무 자르듯 남의 마음을 잘라버렸다. 그 순간 내 마음을 스쳐가는 말이 있었다.


'아무 걱정 없이 사랑만 할 수 있다면...'


우리의 생은 사랑만 하기에도 짧은데 왜 자꾸 서로에게 상처되는 말을 할까. 물론 걱정되는 건 알지만 해도 해도 너무했다. 자꾸만 무시당하는 나의 감정은 갈 곳을 잃어버린 어린아이가 되었다. 집에 가는 길이 어딘지 몰라 집 주변을 빙빙 돌았다. 막내 아이를 사랑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처럼 나에게도 그렇게 봐주기를 바랐다. 나는 남편에게 "당신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얼마든지 많은데 왜 자꾸 화난 듯이 말해. 좋게 좋게 이야기할 순 없어?"라고 말했다. 부모로서 아이들에게 늘 사랑의 말만 해주고 싶고 사랑만 하고 싶은데, 나 자신에게도 아이들에게도 미안했다. 아이들에겐 좋은 기억이 많은 어린 시절을 만들어 주고 싶었고 지금도 바라는 바인데 그렇게 해주지 못하는 것 같아 자꾸만 한숨을 내쉬게 된다.




아무 걱정 없이 사랑만 하고 싶다는 마음에서 걱정을 지우고 마음껐을 집어넣었다. 마음껏 사랑만 할 수 있다면... 내 인생이 헛되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나를 자책하지도 않을 것이고, 우울한 마음이 와도 잠시 잠깐만 머무를 것 같다. 동서는 엄마가 갑자기 암 말기 판정을 받으시면서 사는 거 별거 없게 느껴진다 했다. 그래서 나 자신을 많이 챙기면서 살려고 한다고 했다. 스트레스받지 않고 좋아하는 거 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베풀면서 살 거라고 했다. 동서와 대화를 나누며 동서의 말들이 모두 이해되고 공감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각자의 마음과 감정이 소중하다는 것이다. 불만이 있거나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상대의 마음을 다치게 말하지 말고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진솔하게 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 동서가 엄마를 마지막까지 마음껏 사랑하기를, 엄마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들어주기를 맘 속으로 바라본다.


나 자신에게도 아이들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사랑만 주면서 살고 싶다. 나는 바라본다. 마음껏 사랑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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