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하루지만 조금은 특별한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다. 분주하고 정신없던 주말이 지나고 맞은 월요일, 무난하지만 무난하지 않게 지나가길 바라는 마음에 엽서 한 장을 벽에 붙여보았다.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갈 수 없는 무릉도원을 앞에 두고 자린고비가 굴비를 바라보고 밥 한 숟갈을 먹듯 그림을 보며 글을 써보기로 했다. 티브이 속엔 유명한 축구 선수가 나와 프리미어리그의 일상을 공개하고 연예인들은 모니터를 보며 연신 리액션을 취했다. 딸과 나는 그걸 바라보며 시장에서 사 온 묵에 시원한 육수를 부어 묵밥을 해 먹었다. 묵 위에 올려진 김치와 김가루는 연예인들의 리액션처럼 감칠맛이 났다. 심심한 듯 구워진 소고기 위에 뿌린 소금과 후추처럼 반복되는 일상에 살짝 깨소금을 뿌려보았다.
오늘은 22일, 오일장에 다녀왔다. 첫째 딸과 유모차에 탄 셋째를 데리고 걸어서 15분 정도 걸리는, 역 근처 시장이었다. 평소엔 한산하던 시장 골목과 주변이 장사꾼들과 할머니 할아버지들로 북적였다. 생선, 고기, 과일, 채소, 국밥, 간식거리 등이 넘쳐났다. 우린 좁은 골목골목을 다니며 구경했다.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그곳에서 아이와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며 조금은 다른 일상을 경험했다. 평소 사람 많은 곳을 피해 한산한 곳을 찾는 우리 가족이기에 사람 간의 간격이 좁아지는 북적이는 시장을 간 것은 꽤 오랜만이었다. 곳곳에서 풍겨오는 음식 냄새와 수많은 물건들이 색다른 감성을 채워주기에 충분했다. 너무나도 인간적이고 사람 냄새나는 곳이지만 조금은 낯선 풍경이었다. 주로 집과 동네의 마트를 오갔던 일상에서 15분 걸어 나가 또 다른 세상을 만난 느낌이었다.
시장 골목을 다니며 등이 굽어진 할머니를 보고 지금 나의 젊음에 감사하지만 머릿속에선 늙어버린 미래의 내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나는 어떤 노인이 될지, 아이들이 다 장성하면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그때도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있을지, 변해버린 내 모습이 낯설지는 않을지 너무나 먼 것 같은 미래를 걱정했다. 지금의 현실도 헤쳐나가느라 버겁고 무거운데 언제일지 모르는 마지막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을 수 있을지 감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말복이 지나고 여름의 끝자락을 맞이하고 있다. 어느새 저녁엔 시원한 바람이 불고 또 한 계절이 지나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기어다니기만 했던 셋째 아이는 의자를 붙잡고 일어나 옆으로 걷기 시작했다. 가끔은 손을 떼고 중심을 잡고 서있는다. 우렁찬 울음소리로 출생의 순간을 알렸던 작디작던 아이는 시간의 속도에 맞춰 점점 묵직해져 갔다. 아이의 성장과 선선해지는 날씨로 시간의 흐름을 온몸으로 맞고 있다.
내 나이도 4년 후면 불혹이 된다. 아직도 어린아이 같은 마음이 내 안에 있는데 내 육체는 시간의 흐름을 막지 못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시간과 자연의 변화 속에 작아짐을 느끼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그 속에서 서로 아웅다웅하며 적고 많음과 높고 낮음을 논한다. 누구에게나 시간이 공평하게 존재한다는 걸 잊고 있는 것 같다. 복잡했던 마음도 무수히 지나가는 시간 속에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그럼에도 잘 살아내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을 보며 코끝이 시큰해져 온다. 평범해 보이는 일상이지만, 그 일상마저 너무나 소중해 애달피 우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어깨에 걸쳐진 책임으로 무거운 하루를 보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시장 속 많은 인파와 풍경은 이렇게 내게 많은 생각들을 하게 해 주었다.
한 나라를 책임지는 대통령도, 기업을 이끌어나가는 CEO도 아닌, 무대 위 온몸으로 열창하는 뮤지컬 배우도 아닌, 그저 '나'라는 한 사람을 발견했다. 중책을 가진 비범한 인물은 아니지만, 삶의 소신을 가지고 떳떳하게 살아나가고 싶다.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로서 아이들을 독립적으로 키우기 위해 노력하고, 내 주변을 돌보며 선의를 베푸는 사람이 되고 싶다. 비록 현실 속 나는 티브이 속 유명인을 바라보고 그들의 리액션에 웃기도 하지만, 지금을 뛰어넘을 수 있는 단단한 마음을 가지고 싶다. 자격증 수업을 진행하시는 협회 소장님은 내게 '조용한 탱크'라고 말씀해 주셨다. 조용히 내 안에서 열정을 불태우는 나를 빗대서 붙여주신 별칭이다. 때로는 변화 없는 일상에 지루함을 느끼기도 좌절감을 맛보기도 하지만, 오늘의 나는 변함없이 스스로 변화하기 위해 노력한다. 수업 중 자신의 강점에 해당하는 표현을 고르는 시간이 있었는데 같이 공부하는 선생님들은 나에 대해 '자기 확신이 강한', '노력하는' 이 두 가지를 뽑아주셨다.
내 생각에 확신을 가지고 행동할 때도 있지만 나 자신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 위축될 때도 많이 있다. 그런 나에게 이 두 가지 표현은 나의 마음을 꽉 차게 해 주었다. 진실로 내 마음을 들여다보게 되었고,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포기는 없다고 스스로를 다잡게 되었다. 오늘도 똑같은 내가 아니라 조금은 변화된, 단단한 심장을 가진 내가 되자고 다짐하는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