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내가 보통의 너에게

너라면 그럴 수 있어

나는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보다 혼자 있을 때가 더 많다. 혼자 있어야 글을 쓸 수 있고 사유할 수 있기 때문에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편이다. 원래 성향 자체도 혼자 있는 걸 더 좋아하기도 하지만 가끔은 너무 혼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돈을 벌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사람도 만나야 하고 그래야 관계 속에서 발전하고 성장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피할 수만은 없다는 것을 안다. 가만히 나를 들여다보면 혼자가 편한 이유를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공감이라는 것이 정말 어렵다 느껴지기 때문이다. 고개를 끄덕여주거나 "그렇군요." 하는 말들을 듣기가 어렵다. 한 달에 한 번씩 줌으로도 모임을 갖는데 참 많이 불편했다. 아무래도 연령대가 나와는 맞지 않아서인지 가르치려 한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난 그저 이야기를 주고받고 싶을 뿐인데 그들의 이야기에 섞이질 못하겠다. 좋아서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책임감 때문에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이건 단순히 나만의 생각과 감정이기에 어느 누구도 내 이야기에 비판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군요."


나는 TV 프로그램들 중에서 상담 프로그램을 굉장히 좋아한다. 어느 누구도 출연자의 이야기에 비판을 하지 않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함께 감정을 느껴주기 때문이다. 어차피 정답은 자신에게 있기 때문에 가르쳐 주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함께 아파해주고 안타까워해 주면 된다. 출연자들이 공감으로 치유가 되듯이 나도 치유가 되는 느낌이었다. 공감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내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감정 그대로를 드러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나는 그저 당신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고 바라만 볼뿐이다. '그렇군요.'


사람은 신이 아니다.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종교지도자도 사람이다. 보통의 나와 다른 게 있다면 수행하며 정신을 갈고닦는 것이다. 그 누구도 미워하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며 자신의 내면을 닦고 또 닦는다. 심리학에서는 남을 탓하는 것을 '투사'라 한다.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모든 것들이 자신에게서 왔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은 자신이 보고 있는 모든 것들은 자신의 세계에서 자신이 만든 것이라 한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그걸 보지 못하고 남을 탓하기에 바쁘다. 그래야 자기 자신을 합리화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제대로 된 공감을 받지 못해 사람 들 사이에 있는 것이 불편한 것도, 사람들에게 제대로 공감해 주지 못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탓하고 있는 것일 거다.


고등학교 친구 중에 두 아이의 엄마가 있다. 그 친구는 어렸을 적 받았던 엄마로부터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고 엄마를 원망하며 살고 있다. 계속해서 심리 상담과 치료를 받고 약을 먹고 있다. 친구의 삶은 온통 엄마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 차 있다. 아주 가끔 친구에게서 전화가 온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모든 이야기가 엄마에 대한 원망뿐이다. 자신이 말을 더듬는 것도 폭식을 하는 것도 엄마 때문이라고 한다. 답이 없는 대화는 도돌이표처럼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 친구의 마음은 이해한다. 엄마를 미워하는 감정을 나도 느껴봤었기 때문에 공감해줄 수는 있다. 하지만 나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는 상대를 이해할 수 없고 엄마를 향한 원망의 감정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의 대화는 더 진전이 되지 않는다. 지금은 아예 전화가 오질 않는다. 친구의 카톡 프로필 사진만으로도 친구의 근황을 알 것 같다. 사탄의 인형이 친구의 카톡 배경 사진이다.


누구를 원망한다는 건 자신을 갉아먹는 일이다. 상대를 미워하는 것처럼 자신을 아프게 하는 것도 없다. 상대가 미운만큼 나 자신에게 심리적 고통이 돌아온다. 고통은 나 자신도 아프게 하지만 내 배우자도 내 자녀들도 아프게 한다. 심리적 고통의 원인을 알지 못하고 상대를 탓하기만 하면 내 삶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늘 제자리일 뿐이다. 조금은 마음이 아픈 이야기 일 수도 있겠지만 모든 것의 원인은 내 안에 있다. 내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에게 벌을 내릴 수 없다. 원인이 나에게 있다 해서 나에게 벌을 주는 것도 안된다. 내 마음속 해결되지 않는 감정들을 토해낼 수 없고 상대에게도 몰아붙일 수 없을 때 자신을 아프게 해서라도 그 마음속 고통을 잊으려고 할 때도 있을 것이다. 나 또한 실제로 그렇게 내 몸을 아프게 하지는 않았지만 나 자신의 감정을 속이는 것으로 나에게 벌을 주었던 때가 있었다. 그땐 나 자신의 감정을 속이고 버리는 것만이 관계 회복을 위한 것이라 생각했다. 아무도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거나 나의 감정을 인정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나 자신을 버리는 것 만이 답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모든 것의 원인이 나에게 있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고 나를 탓하고 아프게 하지 않는다. 그저 내 안에서 느껴지는 감정들을 바라볼 뿐이다. 내 감정이 틀렸다고 나를 벌주지 않는다. 감정엔 답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느껴지는 대로 사람들에게 표출할 수는 없다. 대신 나는 이렇게 글을 쓰며 내 감정을 표현하고 마음의 아픔을 덜어 낸다. 그릇에 밥을 담듯이 내 마음도 그릇에 담아 바라본다. 그리곤 그 그릇에 세재를 묻힌 수세미로 깨끗이 닦아낸다. 뽀득뽀득하게 깨끗해진 그릇을 잘 말려 그릇 장에 넣어둔다. 가끔 마음에 혼란이 올 때 다시 그 그릇을 꺼내 내 마음을 담아낸다.


어쩌다 한 번씩 아이들이 학교나 유치원에 가기 싫어할 때 나의 엄마는 손주인 우리 아이들에게

"그러면 안돼. 학교나 유치원은 꼭 가는 거야. 학생이 학교 가는 건 당연하지." 라고 말한다.


둘째가 떼를 쓸 때 남편은 이렇게 말한다.

"또 떼쓰는 거야? 크리스마스에 선물 못 받겠네. 산타할아버지한테 선물 주시지 말라고 얘기해야겠다."


시어머니는 떼를 써서 아빠를 힘들게 하는 둘째에게 볼 때마다 이렇게 말씀하신다.

"할머니랑 한 약속 잘 지켰어? 떼 안 쓰면 가방이랑 새 신발 사줄 거야. 떼썼는지 안 썼는지 엄마한테 확인해볼거야."


모두가 아이들을 사랑하는 건 안다. 그런데 감정을 먼저 물어보고 들어주는 사람은 없다. 무엇 때문에 우는지 물어보지 않는다. 단순히 떼를 쓰는 그 자체를 비판하고 혼을 낸다. 그럼 아이는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어떻게 다루어 내지? 자신이 원하는 바가 있어 떼를 쓰는 건데 무엇 때문에 속이 상했는지 물어봐주기는 커녕 혼내기만 하니 아이가 어떻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잘 이야기할 수 있을까. 자신의 힘든 감정을 말하면 혼이 날 테니 자꾸만 숨기게 되고 억누르게 되지 않을까? 그럼 그 감정이 어떤 순간에 빵 하고 터져버릴지 모른다. 자신도 감당하지 못할 때가 온다. 그런 아이를 보며 마음이 아프다. 나 자신만은 아이의 감정을 똑바로 쳐다보고 알아주려고 애쓴다. 내 마음조차도 흔들릴 때가 많지만 그 순간을 아이를 위해 지혜롭게 넘어가려고 한다.


사랑에는 조건이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사랑에 조건을 달고 있지는 않을까? 내가 너에게 이것을 해주었으니 너도 이렇게 해야 된다고 말하지 않는가?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어? 밥 먹이고 옷 입히고 학교 보내고 학원 보내고 너를 위해 쓴 돈이 얼만데 나에게 어떻게 이래?


많은 부모들이 아이를 많이 사랑하지만 아이가 떼를 쓰거나 대들기라도 하면 이런 말들이 속에서부터 올라올 것이다. 그 말들을 막으려 애써보지만 아이를 향해 내뱉는 말들이 상처가 될 거라 인식하지 못하고 쏟아져 나올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자신이 의지할 곳은 부모뿐이라는 것을 알기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나는 오늘도 다짐하고 내일도 다짐한다. 너의 마음에 공감이라는 사랑을 넣어주겠다고. 그리곤 '너라면 그럴 수 있어'라는 말을 되뇐다.




보통의 내가 보통의 너에게 공감의 위로를 보낸다.

나는 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고개를 끄떡인다.

"그렇구나. 너의 마음이 그랬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