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운전 중 숨을 못 쉬겠다며 창문을 내리고 긴 숨을 내뱉었다. 가슴이 답답한 것인지 어딘가 많이 불편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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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정확히 기억나지도 않을 만큼 짧은 연애를 마치고 결혼을 했다. 독립해 본 경험이 없던 우리는 결혼으로 함께 독립을 해야 했다. 남편의 나이 서른, 내 나이 스물일곱. 적지도 많지도 않은 나이였다. 나는 늘 독립을 꿈꾸었지만 의존성이 강해 나 스스로 존립하기란 꽤 어려운 일이었다. 경제적으로도 자립할 수가 없었다.
그런 우리가 만났으니 얼마나 서툴렀을지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집도 부모님 도움을 받아 전세로 살게 됐으니 우리의 독립은 완전한 독립이 아니었다. 우리 집에서 시댁은 걸어서 10분 남짓. 반찬도 얻어다 먹고 저녁도 시댁에 가서 먹고 올만큼 왕래가 잦았다. 덕분에 생활비를 많이 아꼈지만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은 높아지지 않았다. 여전히 우린 아이였다.
아이와 아이가 만난 우리 부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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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적인 그만의 원칙과, 자신이 세운 원칙에서 벗어나버리는 행동을 했을 때 따라오는 비난의 말들은 나의 심장을 찌른다.
지난 주말, 또 한 번의 폭풍이 우리를 휩쓸고 갔다. 서로 도저히 견딜 수 없으니 그만하자고 소리쳤다. 남편은 도저히 나 없이 아이들을 돌볼 자신이 없는지 나와 아이들 모두 나가라 했다. 나는 대충 가방에 필요한 것만 얼른 챙겨 아이들과 도망치듯 집을 빠져나왔다. 외투도 걸치지 못하고 막내를 업은 채로 뛰쳐나왔다.
갈 곳은 역시나 친정뿐이었다. 아이들과 지하철역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던 중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을까 말까 고민하다 전화를 받았다. 남편은 원래 가기로 되어 있었던 시댁에 가자며 한 바퀴만 돌고 오라고 했다. 남편은 역시나 자신이 혼자가 되고 그런 모습을 자신의 부모님께 보여드릴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남편에겐 내사된 엄격한 부모가 있다.
남편과 다툴 때마다 남편이 항상 하는 말이 있다.
"내가 언제 너 공부하는 것 가지고 뭐라 한 적 있어? 내가 싫다고 하는 건 하지 말아야지"
그럼 난 남편에게 되묻는다.
"그럼 당신은 뭘 하고 싶어?"
남편은 이렇게 답한다.
"화장실 공사하고 싶어. 공사하게 300만 원 내놔!"
내가 말한 의도는 이게 아닌데. 가족을 위한 것 말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고 싶은 걸 물은 건데 항상 돌아온 대답은 집안을 고치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남편 자신에 대한 걸 물으면 자신에 대해 대답한 적이 거의 없다. 그는 항상 이렇게 말한다.
"너 말하고 행동하는 거 찍어서 보여줄게. 네가 어떤 애인지. 네가 봐도 이상하지 않은지.",
"너는 결혼하지 말고 혼자 살았어야 해. 아님 돈 많은 남편 만났던가 해야 했어"
남편과 대화를 하다 보면 남편에겐 내가 자신에게 비교 대상이 되는 것 같다. 세상엔 나보다도 욕심 많고 하고 싶은 걸 해내고 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남편에겐 공부하는 내가, 필요한 것을 사는 내가 욕심 많은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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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아이이게 들은 이야기가 있다. 시어머니가 큰아이에게 해주신 이야기이다. 남편이 고등학생 때 드럼을 배우고 싶어 해서 시어머니가 시아버지에게 허락을 구해야 했는데 시아버지가 허락을 하지 않아 배우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시어머니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계신 지 큰 아이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신 것이다.
내가 생각했을 때 부부란 함께 의논하고 결정해야 하는 사이인데 시부모님은 전혀 그런 관계가 아니셨던 것 같다. 남편에게 허락을 구한다는 것 자체가 거북하다. 그런데 지금의 남편과 나 사이도 마찬가지다. 나는 남편에게 허락을 구해야 하고 남편이 싫다 하는 건 하지 말아야 하는데 나는 내가 하고자 하는 건 해야만 한다.
남편과 나는 늘 이런 주제로 싸움이 난다. 남편은 하지 말라 하고 나는 해야만 한다고 한다.
남편은 지금도 자신의 욕구와 감정을 이야기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어렸을 적 권위적이었던 아버지로 인해서 하지 못했던 것들이 많았던 것 같다. 그리고 여기서 시어머니는 남편의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된 의견 제시도 하지 못하셨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자란 남편은 부부 사이는 원래 주-종 관계인 것처럼 인식이 된 것 같다. 잘못된 인식이 부부 사이를 힘겹게 하고 있다.
결국 실제 부모보다 자신에게 내사된 부모가 더 엄격하여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것이다.
남편의 명령과 비판적인 어조로 고통받는 나
남편의 부재로 고통을 잊어버리는 나
오늘도 역시나 나는 좋아하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깔깔 웃어댔다. 내 머릿속엔 지난 주말의 고통이 사라진 지 오래다. 오로지 지난 주말에 받았던 큰 스트레스를 날려 버리고 싶은 마음과 수업 과제에 대한 생각만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남편은 어제까지만 해도 자신의 가슴을 치고 한숨을 내뱉었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답이 없다는 듯 그를 불쌍히 여겼다.
남편이 그토록 원하는 화장실 공사 비용만 주면 해결이 될까?
갈등이 해결되지 않고 자꾸만 반복되는 이유는 나의 잊어버림 때문일까?
나라는 사람을 부정하면 기분이 좀 나아질까?
해결이 되지 않을 걸 알기에 나도 모르게 잊어버리게 되는 걸까. 잊으려고 문제 상황을 회피하는 걸까.
남편과 함께 있을 때 남편과의 갈등이 힘겹고 괴로워 피하고만 싶을 때가 많이 있었다. 큰 싸움이 있지 않아도 남편에게 잔소리를 듣지는 않을지, 아이들의 떼로 화를 내지는 않을지 전전긍긍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그런 상황을 막으려 해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막아진다 해도 그 문제는 계속 반복이 되었다.
그런 상황에 대한 스트레스를 잊기 위해 즐거움을 찾아 헤맸다. 잊으려고 의도하지 않아도 난 계속해서 스스로를 재미있게 하는 방법을 찾았다. 핸드폰 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내거나 음악을 밤새 들었다. 몸은 피곤한데도 계속해서 밤을 새우면서 혼자 놀거리를 찾았다. 나 자신의 욕구가 무엇인지 지금의 감정은 어떤지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시간이 얼른 지나가기를 바랐다. 그것이 습관이 되었는지 나는 혼자 있을 때 문제 상황을 곧잘 잊어버린다. 그리곤 얼른 제정신으로 돌아오려 애쓴다. 아이들을 돌봐야 하기 때문이다.
결혼은 현실, 사랑의 의미가 퇴색되어 버렸다.
내가 가진 엄마와 아내라는 페르소나. 남편도 더 이상 날 '나', 온전한 '존재'로 보지 않는다. 우리가 결국 싸우는 이유는 엄마이자 아내라는 역할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한 가정의 엄마이자 아내이니까 자신의 욕심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엄마니까 당연히 아이들에게만 집중해야 하고 남편에게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남편이 싫어하는 건 하지 말아야 한다.
나의 감정과 욕구를 말하면 이기적인 사람이 된다.
나는 당당히 공부한 대로 남편에게
"우리는 부부이지만 각자의 경계를 유지해야 해. 당신은 당신으로서 나는 나로서 존재해야 해. 그래야 부부생활을 오래 유지할 수 있어."
남편은 이해를 못 하겠다는 표정과 말투다. 계속 아빠로서 남편으로서의 이야기만 한다.
나의 이야기에 "너 잘났다."라는 답으로 돌아올 뿐이다.
사랑은 희생과 헌신일까?
기념일마다 남편에게 선물을 받곤 한다. 몇 주 전 장을 보러 대형마트에 갔을 때에도 남편은 그동안 셋째 키우느라 고생했다며 내게 옷을 사주었다. 그땐 참 고마웠다. 필요했던 티셔츠를 사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그런데 고마운 마음은 이때뿐이었다. 남편에게 잔소리를 듣게 되면 고마운 마음은 쏙 들어가고 나를 방어하는 말들이 틔어 나온다. 나를 자극하는 말을 가볍게 지나가겠다던 다짐은 사라지고 만다.
물론 남편이 우리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본인보다 가족을 위해 돈과 시간을 쓰는 것도 매우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남편은 왜 행복해 보이지 않는 걸까? 사랑하는 아이들을 볼 땐 저절로 행복한 미소가 지어지고 본인이 좋아하는 축구를 볼 때 열중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그 외엔 늘 어딘가 불편한 모습이다. 재미있는 동영상을 볼 때도 웃고 있지만 그 웃음은 그때뿐이다.
진정한 사랑은 '나'를 알아 가는 것부터가시작이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온전한 '나'를 알아가게 된다. 나의 욕구가 무엇인지 지금 나의 감정은 어떤지 주의 깊게 살피게 된다. 다른 사람이 나를 들여다 봐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나를 사랑해 주기를 돌봐 주기를 기대하기보다는 나 스스로 나의 기대를 채우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내가 원하는 삶의 방향을 위해서 비전을 세우고 계획도 세우면서 실천하게 된다.
내가 공부하고자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나 자신을 위한 것도 있지만 아이들과 남편을 위해서 이기도 하다. 의지하고 기대하는 엄마이자 아내가 되고 싶지 않아서이다. 독립된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공부하고 책을 읽는다. 아이들을 무사히 건강하게 독립시키고자 나부터 독립하기로 결심했다. 아이들을 나의 '살지 못한 삶'의 보상 혹은 대리만족의 도구로 만들지 않으려고 한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우리 아이는 이런 것 잘해. 대회 나가서 상도 타고 학교 성적도 좋아서 학교에서 칭찬이 자자해"라는 이야기보다 "나는 열심히 글을 쓰고 있어. 곧 있으면 신간이 나올 거야. 책 나오면 선물하게"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내로서가 아닌 나로서 당당히 관계를 맺고 싶다.
갈등이 해결되었다거나 쉽게 흘려보내는 건 아니다. 다만 나의 마음이 단단해지고 있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다. 아직도 남편과의 갈등이 반복되고 있지만 이젠 갈등을 피하기보다는 바라보게 됐다. 어쩌면 자꾸만 나를 찾아가는 나의 모습이 남편에겐 이기적으로 보일 수 있다. 남편은 헌신과 희생으로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자 원하고 그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라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빠와 남편이라는 페르소나를 자신이라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나의 모습이 이기적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랑은 헌신과 희생만이 정답이 아니다. 희생과 헌신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인정받고 되돌려 받기를 원하게 되면 타인에게 실망하고 원망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는 부모나 자식 이기 전에 '나'이다. '나'를 알게 되면 나와 상대를 온전한 한 개인이자 존재로 받아들이게 된다. 욕구와 감정을 지닌 한 존재로 바라보게 된다. 나는 바란다. 나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한 관계가 아닌 연결됨으로 함께 성장해 나가는 관계를 만들어 나가기를. 나는 그것이 사랑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