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끔 왜 살고 있고 뭘 위해 살고 있는지 자문해 본다. 아이들을 돌보고 살림을 하는 바쁜 일상 속에서도 글쓰기를 놓지 못하고 부여잡는 나를 보면서 드는 생각이다. 책을 읽어도 글쓰기 주제가 떠오르지 않을 때, 그럼에도 글을 쓰고자 애쓸 때, 글은 쓰고 싶은데 전혀 글쓰기에 집중할 수 없는 환경일 때 이런 생각이 더 많이 든다.
무엇을 하든 노력과 반복이 중요하다. 그런데 그것을 하는 명확한 이유가 없으면 그것을 지속하기가 어렵다. 인생은 내가 선택하고 운명은 개척하는 거라 하지만 내 마음대로 계획하고 움직이지 못한땐, 해야만 하는 이유가 흐릿해진다. 글쓰기를 좋아하고 하고 싶다는 이유만으로는 글쓰기의 방향을 잡기가 어려워진다. 다시 왜 이것을 해야만 하는지 나에게 질문을 해야 한다. 무엇을 위해서 하려고 했는지 초심으로 돌아가 되짚어 봐야 한다.
예를 들어 학생이 공부가 하기 싫다 해서 무조건 쉬거나 놀 수만은 없다. 지금의 공부가 왜 필요한지 무엇을 위해 해야 하는 것인지 동기부여를 해야 한다. 공부를 해야만 하는 이유가 미래를 위해서 인지, 학생이라서 인지 잘 생각해 봐야 한다. 원하는 모습을 내 눈앞에 그려볼 수 있을 때 해야만 하는 이유가 명확해지고 간절해진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막연하게 매일 글쓰기를 한다고 글쓰기 실력이 느는 것이 아니다. 글쓰기를 통해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글쓰기의 목적이 나만 볼 수 있고 나만이 이해할 수 있는 일기 인지, 다른 사람들에게 읽힐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글을 쓸 것인지 목적을 정해야 한다. 글쓰기로 이루고자 하는 모습을 내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보면 글쓰기의 내용이나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구체적으로 떠오른다.
나는 가치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 글을 쓴다. 내가 생각하는 가치로운 삶이란 '사랑'을 주고받는 삶이다. 자식에게 사랑을 주고 또 주고 싶은 것처럼 세상에 사랑을 주고 또 주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다. 세상에 태어났으니 이왕이면 함께 즐겁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왕이면 조금 더 지혜롭고 현명하고 싶다. 처음엔 글을 쓰기 위해 책을 보았고 내 이야기를 하고 싶어 글을 썼지만 지금은 어떻게 하면 사랑을 잘 줄 수 있는지 고민하기 위해 책을 읽고 글을 쓴다. 나만의 방향을 구체적으로 정하고 있는 중이다. 글을 쓰는 목적과 이유를 분명히 해야 언젠가 내 이름이 적힌 책 한 권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주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 한다. 우는 아이를 달랠 때에도 우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아기가 배가 고픈지 졸린지 기저귀가 축축한지, 우는 이유를 정확하게 알면 아이를 금방 달랠 수 있다.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글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지, 무엇을 알고 싶고 깨닫고 싶어 하는지 알면 글을 쓸 때 많이 헤매지 않게 된다.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나도 원할 수 있고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방도 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책 속에는 '보편적 가치'가 담겨야 한다고 한다. 나만이 느끼는 것을 나만 알 수 있게 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는, 바람직하다 생각하는 가치가 들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처음 어딘가에 글을 올렸을 때를 떠올려보면 그 말이 왜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있게 된다. 블로그에 처음으로 올린 글들을 보면 감정에 충실한 나머지 감정의 표현이 격하게 나타나거나, 문제의 원인을 나에게 찾지 못하고 상대방 혹은 환경을 탓하는 표현들이 많았다. 그런 글들은 결국 나만 이해받고자 하는, 내 감정만 털어놓은 일기일 뿐이었다. 아마도 읽는 사람들은 '그래서 도대체 뭘 원하는 건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보편적 가치란 인간의 존엄성 · 자유 · 평화 등과 같이 대부분의 사람이 의견을 같이 하고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가치라고 한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알지 못한다. 이 세상이 어떻게 생겨나게 됐는지도 알 수 없다. 이 세계가 하나의 예술작품이라면 작가의 만든 의도나 목적을 알고, 작품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 자신이 태어난 목적과 이유를 알면 살아가는 것이 좀 더 수월했을 것이다. 우왕좌왕하지 않고 이 세상을 만든 목적대로만 살아가면 됐었을 텐데, 우리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해 부딪히고 헤매면서 그렇게 살아간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의 길잡이가 되어 줄 책을 읽는 것이고, 더 잘 살아내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다.
잘 살아낸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알고, 성찰하며 사는 것이다. 책 <아이는 부모의 등을 보고 자란다>에서 성찰은 먼저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는 솔직함과 부족함을 인정할 줄 아는 겸손함, 잘못을 즉각 고치는 실천 정신이 있어야 행할 수 있다고 했다. 이런 자세가 바탕이 될 때 진정한 성찰을 할 수 있고, 자신의 삶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들어 갈 수 있다고 한다.
삶에는 정답이 없고 그 누구도 정답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내 마음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정답이 정해져 있다고 해도 그 누구도 정답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다. 사람은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책도 정답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어떤 길이 더 나은 길이고 어떤 삶의 방향을 따라가야 하는지 배우고,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 되어준다. 책 속의 배움을 따라 나만의 글을 통해 성찰해 나갈 때 글을 쓰는 이유가 명확해질 것이다.
"엄마는 힘들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은 뭐야?"
"엄마는 당연히 글쓰기지. 너는?"
"나는 사람들 앞에서 춤추고 말하는 거야. 오늘도 친구들 앞에서 체육 선생님 대신에 체조했어."
큰아이가 태어나 걸을 수 있게 되면서 길을 걸을 때마다 사람들만 만나면 인사를 했다. 손을 흔들고 말을 걸었다. 어른들이 지나가면서 "저 아이는 커서 크게 되겠다."라고 말씀하실 정도였다. 10살이 된 아이는 그 성격 그대로 매우 적극적이다. 친구들 앞에서 항상 뽐내기를 좋아한다. 주도하는 것도 좋아해 2학기부터 있을 반장선거에 꼭 출마하겠다고 한다. 성향은 이렇게 타고나는 걸까?
아이가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것처럼 나도 글쓰기를 통해 관심을 주고받기를 원한다. 아이처럼 주도적으로 앞에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글을 통해 생각을 사람들과 함께 나누면서 성장하고 발전해 나가길 원한다. 글쓰기는 나에게 힘들지 않은 즐거운 일이다. 글쓰기란 성향이 있다면 그 성향을 타고난 걸까? 글쓰기 능력을 타고났다는 것이 아니라, 글쓰기를 좋아하는 성향이라는 말이다. 쓰고 생각하고 고치고 하는 시간과 품이 들지만 그 시간이 내게는 참 즐겁다. 그것이 내게 살아갈 원동력이자 이유가 되어준다.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도구가 되어 준다.
오늘도 나는 글쓰기를 통해 나를 알아간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를 나에게 물으면서 좀 더 가치롭게 살기 위해 글을 쓴다. 좋아하는 것을 발견하고, 좋아하는 것을 더 잘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는 건 행운이다. 고개 숙이고 나를 탓하며 지나갈 뻔한 내 인생이 글쓰기를 통해 빛이 난다. 나는 그 빛을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홀로 빛나는 별은 없다. 함께 이기에 반짝임이 극대화된다.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하고 싶어 하고 기쁨을 나누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혼자서는 행복할 수 없듯이 오늘도 나는 혼자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글을 쓴다. 너를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