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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레'가 아닌 '연결'로

내가 원하는 것은 '진심으로 서로 주고받기를 원하는 마음'이다.

흔히 가족을 '굴레'에 비유하곤 한다. 벗어버리고 싶지만 벗어버릴 수 없다. 굴레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는데 그중 두 가지 뜻에 마음이 갔다. 첫 번째로, 굴레는 '말이나 소 따위를 부리기 위하여 머리와 목에서 고삐에 걸쳐 얽어매는 줄'이다. 두 번째로 굴레는, 부자연스럽게 얽매이는 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지난 주말 나는 다시 '가족의 굴레'를 떠올리게 되는 일을 겪었다.


지난 주말 아빠 생신이어서 친정부모님 집에 다녀왔다. 집에서 형부가 만든 케이크를 가져온 언니는 점심을 먹자마자 케이크에 초를 꽂고 촛불을 켜려 했다. 나는 "왜 이리 급해. 어디가?" 하고 물었다. 소화시키고 천천히 해도 될 법했는데 빨리 어딜 가야 하는 사람 모양 빨리 해치우려 했다. 이에 엄마도 가세해 빨리 하자며 재촉했다. 왜 그리도 급하게 빨리 해야 하는지 이유도 말하지 않은 채 서둘렀다.


때론 이유도 말하지 않은 채 하는 행동은 상대방을 기분 나쁘게 한다. 말없는 폭력과도 같다. 언니에게는 다른 사람의 기분을 나쁘게 할 의도는 없었을 것이다. 단지 '빨리 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즐거워야 할 생일파티를 빨리 해야만 했던 것이다. 마치 일을 처리하듯이 생일 파티를 끝내려 했다. 다 같이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고 아빠가 촛불을 불자마자 그렇게 아빠의 생일 행사는 끝이 났다.


그 속엔 함께 하는 즐거움이 없었다. 상대방의 안부를 묻는 대화도 없었다. 그저 케이크에 초를 꽂고 촛불을 부는 행위와 행사의 과정 중 꼭 있어야 할 생일축하 노래만 있었을 뿐이었다. 언니는 그저 행사를 주체한 주최자로서 머릿속에 있는 큐시트대로 진행하는 사람이었다. 철저한 계획형 언니의 면모를 볼 수 있었다. 왜 급하게 하냐는 나의 말엔, 어떤 설명도 없이 무조건 빨리 해야 한다는 말만 반복했다.


사랑과 존중, 이해, 감사, 배려는 없었다. 진심으로 서로 연결되고픈 마음이 보이지 않았다. 언니에게 가족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고 있는 걸까. 즐겁지도 않은 모임을 왜 의무적으로 이끄는 것일까. 회사라면 월급이라는 보상을 받기 때문에 당연히 해야 할 테지만 그 어떤 이익도 없는 가족 행사를 왜 만들어 내는 걸까.




분명 언니의 행동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 없이 급급하게 일을 처리하듯 해치우려 했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나는 집에 돌아와서도 계속해서 기분이 나빴지만 언니가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서 마음을 가라앉혔다. 언니의 행동에 판단을 하기보다 관찰해 보려 했다. 그리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나의 느낌과 욕구에 초점을 두어 생각해 보았다.


<비폭력 대화>에서 저자 마셜 B. 로젠버그는 이렇게 말한다.

'분석이나 비판보다는 우리가 무엇을 관찰하고, 그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며 무엇을 원하는가에 초점을 둘 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연민의 깊이를 인식하게 된다. 다른 사람뿐 아니라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도 귀 기울임으로써 존중과 배려, 그리고 공감하는 마음을 기르게 되어 진심으로 서로 주고받기를 원하는 마음이 생긴다.'


'삶에서 내가 원하는 것은 가슴에서 우러나와 서로 주고받을 때 나와 다른 사람 사이에서 흐르는 연민이다.'


결국 내가 원했던 것은 진심으로 서로의 마음을 나누는 것이다. 케이크에 초를 꽂고 촛불을 부는 행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함께하는 마음이 중요하다. 가족은 뿌리이자 정체성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로 존재하고 함께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가족 안에서 단단한 사랑과 이해, 존중이 이루어지면 다른 관계에서도 연결됨을 느낄 수 있다.



'관계'라는 것이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이왕이면 함께 즐거웠으면 좋겠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의무'가 아니길 바란다. 초등학생 때부터 이어져 온 인연이 있다. 파리에서 결혼해 10년째 살고 있는 친한 동생이다. 같은 해에 태어났지만 내가 빠른 년생이라 언니가 됐고 친구는 동생이 됐다. 우리는 그동안 쌓아온 세월과 서로에 대한 진심으로 인해 지금까지도 인연이 이어져 오고 있다. 파리에 살고 있고 각자의 생활로 인해 자주 연락을 하는 편은 아니지만 우리는 늘 서로를 생각한다.


어제 우리는 보이스 톡으로 대화를 마무리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가 길게는 몇 달 연락이 되지 않아도 나는 늘 불안하지 않았어. 멀리서도 나를 생각해주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 믿음이 확고해서 든든한 마음이었어. 연락이 되지 않아도 잘 지내고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어"

"나도 늘 언니를 생각해 왔고, 유일하게 솔직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도 언니이기에 늘 고마웠어. 언니랑 대화를 하다 보면 시간이 가는지도 몰라. 언니가 힘들 때도 좋을 때도 이야기를 나눠보면 다 이야기하지 못할 때도 있잖아. 이야기하지 못할 땐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어. 연락이 안돼도 나 역시도 언니가 잘 지내고 있을 거라고 믿었어"

"누군가 나를 믿어주고 있다는 것을 알면 살아가는 데 참 큰 힘이 돼. 그래서 정말 고마워"

"내가 더 고마워"


'누군가 나를 믿어준다는 것'은 세상에 그 어떤 것도 부럽지 않게 한다. 정말 친한 친구 3명만 있어도 성공한 인생이라고 하는 것처럼, 마치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동생에게도 이렇게 말했다. "나를 믿어주는 동생이 있으니 나는 성공한 거야." 동생에게 고마웠다. 하지만 동시에 어쩔 수 없는 아쉬움이 밀려왔다. 내게 가족이 그런 느낌이 아니어서 말이다.


"나는 널 믿어." 단 한 번도 부모님에게서 들어보지 못했던 말이다. 지금도 여전히 말로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 부모님은 어려서부터 힘들고 어렵게 살아오셨고, 할머니 할아버지에게서 진정한 사랑의 표현을 받아보지 못해 나에게도 그렇게 대하고 계신 거라고 그렇게 생각할 뿐이다.


이젠 굴레가 아닌 연결됨을 느끼고 싶다. 혼자 상처받고 혼자 마음정리하기를 이젠 그만 반복했으면 좋겠다. 상대의 행동이나 생각을 바꿀 순 없다. 하지만 변화하고자 노력해야한다. 내가 변화하면 가족을 바라보는 마음도 변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나는 가족으로 인해 '공부'와 '글쓰기'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다. 가족과 진심으로 서로 주고받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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