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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나 좋아?"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하는, 나는 어린아이

큰 아이가 내게 물었다. "엄마, 나 좋아?". 나는 아이가 내게 사랑을 확인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당연히 좋아하지. 그런데 왜 좋아하냐고 묻는 거야? 사랑을 확인하는 거야?" 연인 사이에서 흔히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 것처럼, 큰아이도 내게 사랑을 확인하려 했다. 문득 돌아보니 나도 늘 부모에게 사랑을 되묻고 싶은 어린아이였다.


어제 꿈엔 아이를 데리고 다니면서 여러 봉지들을 들고 다녔다. 항상 내 옆에는 내가 들고 다녀야 할 짐들이 있었고 나는 그게 버거웠다. 그럼에도 나는 그 봉지들을 들고 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잠에서 깨자마자 그 봉지의 의미가 무엇일까 생각했다. 그 봉지들은 내게 짐이었다. 덜어내고 싶어도 버리고 갈 수 없는 짐이었다.


지난 주말 시댁에서 돌아와 큰아이가 내게 말했다. "엄마, 할머니가 그러는데 아빠는 예쁘고 착한 아들이래. 작은아빠는 집이 멀다고 자주 오지도 않는대." 맞다. 남편은 어머니에게 착한 아들이다. 한 달에 한두 번 이상은 늘 시댁에 가서 얼굴을 비춘다. 토요일에 가서 잠을 자고 오기도 한다. 착한 아들과 늘 사랑을 주고픈 엄마 사이다.


우리 언니와 엄마도 그런 사이다.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 언니도 단 한 번도 속 썩인 적 없는 착한 딸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엄마가 원하는 대로 일도 하고 돈도 벌고... 엄마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진 인형이다. 엄마는 그 인형을 보기 위해 매주 언니집에 가서 조카를 돌본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둘의 사이는 심리학에서 말하는 '밀착'된 사이가 아닐 수 없다. 누가 누군지 구별이 안 될 정도로 둘은 하나가 되어있다. 언니의 모든 말과 행동에 엄마는 긍정의 언어와 표정을 보였다. 언니는 일을 하느라 조카를 돌볼 여력이 없고 엄마는 그 도움을 줌으로써 사랑하는 딸의 얼굴을 매일 마주할 수 있다. 매주 월요일에 2~3시간 고속버스를 타고 가는 수고를 해서라도 그렇게 엄마는 언니 곁에 있고 싶은가 보다.


나는 그 둘 사이를 방해하지 않으려 하는 외딴섬이다. 나는 엄마집에서 고작 1시간 내외로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곳에 살고 있음에도 엄마를 자주 볼 수 없게 됐다. 아무리 힘들고 피곤해도 도움을 요청할 수 없게 됐다.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조카를 위해 언니에게로 떠난 엄마는 깜깜무소식이다.


미운데도 늘 엄마가 그립고 엄마에게 "사랑한다. 태어나줘서 고맙다" 하는 소리를 듣고픈 나는 여전히 어린 아이다. 사랑받고픈 마음을 버리고 싶고 외면하고 싶은데도 여전히 엄마에 대한 사랑을 갈구하는 나는 마음속에 엄마라는 짐을 갖고 산다. 겉으로는 평범한 가정이지만 편애된 사랑은, 사랑이 늘 부족하다고 느끼는 자녀에겐 마음속에 부모에 대한 짐을 갖게 한다. 난 오늘 그 마음의 짐을 덜고 싶다.



나는 늘 아이들에게 "사랑한다"라고 말한다. 안아주고 뽀뽀해 주고 온갖 애정표현을 다 한다. 특히 막내와 있을 땐 더 많이 사랑표현을 한다. 정말 사랑스럽기도 하다. '엄마'라는 짐을 지어주지 않기 위해서 더 많은 사랑을 표현한다. 특히 둘째에게 부족한 엄마의 사랑 때문에 사는 게 힘들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애쓴다. 딸만 셋을 키우다 보니 조금이라도 사랑이 편향된 느낌을 주면, 엄마의 사랑이 부족하다 느끼는 아이는 바로 내게 '엄마의 사랑이 부족해요'라는 말이 들리는 듯한 행동을 한다.


혼자 할 수 있는 것도 다 해달라 하고 다른 사람의 도움도 받으려 하지 않는다. 오로지 '엄마'가 해줘야 한다. 때론 귀찮고 힘들다. 다 해줄 수도 없다. 두 돌도 되지 않은 셋째를 챙기면서 살림을 해야 할 때도 둘째는 엄마를 부르고 또 부른다. 그럴 땐 정말 화가 난다. 나는 "엄마가 도와주고 싶은데 지금 셋째도 돌봐야 하고 집안도 치워야 하고 할 일이 많네."라고 말을 해보지만 아이의 마음이 상하는 건 어쩔 수 없다.


대신 아이의 실수를 과도하게 의식하지 않는다. 초등학교 1학년인 둘째는 가끔씩 변을 참다 팬티에 묻히곤 하는데 누군가 그 실수를 과하게 이야기하면 아이는 바로 울음을 터뜨린다. 그리고 스트레스를 받아서인지 다리를 긁곤 한다. 그래서 늘 아이의 다리엔 상처가 있다. 좀 나아질라치면 또 어느새 딱지가 앉아있다. 나는 그것이 사랑과 존중에 대한 결핍에 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아프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아이의 마음과 생각을 존중하려 애쓴다. 부족하지만 부족한 것을 인정하려 하고 배우려고 노력한다. '나 메시지'와 같은 대화법을 배우면서 적용해 보기도 한다. 실제로 대화법을 적용해 말을 하게 되면 아이도 쉽게 마음이 진정되어 바로 놀이의 세계로 빠져든다.





'엄마, 나는 늘 엄마를 기다렸어.'

...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는 말이 있다. '사랑'에도 때가 있다. 자녀는 늘 부모에게 사랑을 받길 원하고 기다린다. 그 사랑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마음을 말로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자녀의 마음을 아프게 했을 땐 미안하다고 말하고, 자녀가 부모에게 기쁨을 주었을 땐 고맙다고 표현하면 된다. 다른 관계와도 마찬가지로 자녀들하고도 이런 표현을 자주 주고받다 보면 아이들이 살아가는 데 있어 좀 더 풍요롭고 평화로운 인간관계를 맺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고백해 보자면 나는 부모에게서 미안하다, 고맙다, 사랑한다 라는 표현을 자주 들어보지 못했다. 결혼하고 아빠에게서 사랑한다는 표현을 몇 번 들어보았지만 엄마에게선 들어본 기억이 없다. 오로지 '~해!'라는 명력적인 어투의 표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금전적인 지원이 필요할 땐 도움을 주셨지만, 그 도움이 사랑과 감사로 느껴지지 않는 건 왜일까.


사랑의 표현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표현하는 건 쑥스럽지만 어린 자녀들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건 어렵지 않다. 아이들에게 안아주고 뽀뽀해 주고 사랑한다 말하면 아이들은 이 세상을 다 가진듯한 표정을 짓는다. 특히 어린 셋째를 보면서 사랑의 위대함을 느낀다.


아직 말도 트이지 않았는데도 말의 느낌을 알아차린다. 사랑한다 말하면서 꼭 안아주면 아이는 이 세상의 그 무엇도 부럽지 않은 듯한, 정말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물은 알고 있다'라는 책에서 나온 것처럼 말에는 부정적인 느낌과 긍정적인 느낌을 담고 있다. 말로 천냥빛을 갚을 수도 있고 돌이 되어 날아가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칠 수도 있다. 그 말을 던지는 존재가 부모라면 자식에겐 엄청난 마음의 상처와 짐이 된다.


사람이 평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유년시절이 중요하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는 것이 바쁘고 힘들어 마음과는 다르게 부정적인 표현을 더 많이 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공부에도 때가 있다는 것처럼 사랑에도 때가 있다고 믿는다. 편향되고 일관되지 않은 부모의 사랑으로 아직도 마음에 상처와 짐을 갖고 살고 있는 내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사랑의 때를 알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마음에 상처를 입히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쓴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그 짐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자꾸만 갈구하고 기다린다. 엄마에 대한 사랑을.



엄마가 내게 준 단 하나의 선물이 있다. 바로 '이작가'라는 별칭이다. 어려서부터 엄마는 늘 언니를 '이박사'라고 불렀고 실제로 박사학위를 땄다. 엄마가 내게는 그 어떤 별칭도 불러주지 않았다. 나는 간곡히 나게에도 좋은 별칭을 불러줄 것을 요청했고, 책을 좋아하는 나를 위해 '이작가'라고 불러주셨다.


엄마의 사랑에 대한 갈급함으로 글을 쓰게 됐다. 마음 속 결핍은 글을 낳게 했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가게 하는데, 글을 씀으로써 마음의 짐을 덜었고 새로운 창작품을 만들어 냈다. 나만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 게 공감이 갈 수 있도록 쓴 글은 내게 작품이 되어 돌아왔다.


마음 아픈 과거도 글로 승화되어 공감을 얻고 생각할 기회를 줄 것이다. 나는 그런 글을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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