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써야만 하는 세 가지 이유
나는 언니에게 말했다. "나는 사실 공부를 좋아해. 사회과학에 관련된 책을 좋아해. 그래서 관련 분야의 대학원에 가고 싶어. 공부도 글쓰기도 일에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하고..." 언니가 내게 말했다. "맞아 그래서 나도 대학원에 간 거야. 학위를 따니 강의 의뢰가 많이 들어오더라고" 언니는 처음으로 자기 이야기를 했다. 아이에게 욱하고 화를 낸다는 것과 아이의 견문을 넓혀주고 싶다는 이야기까지. 그리곤 내게 브런치가 잘 되어가냐고 물었다.
관심은 사랑의 한 부분이라 생각한다. 궁금한 것이 있고, 그것을 물어올 때 관심을 받는 느낌이 든다. 그걸 이제야 알았다. 그동안은 일이나 경제적으로 나보다 늘 우위에 있다 생각했기에 하나뿐인 언니가 멀게 느껴졌다. 만나면 내가 늘 받는 쪽이었기에 결혼을 해서도 받는 것이 많아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그래서 더 만나기가 꺼려졌다. 부모님도 마찬가지다.
내 나이도 40을 바라보고 아이도 셋이다 보니 '나'로서의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으셨던 모양이다. 부모님 또한 현실에 집중해 살아오셨을 테니 말이다.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는 문제가 가장 컸기 때문에 본인들의 삶보다는 먹고사는 것이 가장 큰 삶의 과제였으리라. 본인들의 꿈을 이뤄 줄 수 있는 사람은 언니뿐이었을 것이다.
본인이 본인의 꿈을 이루기 위해 애쓰는 것보다 자신의 꿈을 이뤄줄 큰 딸에게 마음이 더 갔을 것이다. 언니는 미래의 희망이었고 현재의 자랑이었다. 나는 골칫거리였고 걱정거리였다. 예전에는 몰랐다. 걱정도 사랑이라는 것을. 내가 원하는 사랑의 방식은 아니었지만 부모님에겐 다른 시선으로 나를 바라볼 여유가 없으셨던 것이다. 지금도 그렇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고 글을 쓴다. 걱정도 사랑의 일부라는 것을 망각하지 않기 위해서 글을 쓴다. 나의 가장 주도적인 모습은 글쓰기로 나타난다. 내가 꾸준히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은 걱정을 관심으로 바꾸기 위한 노력이다. 더 이상 측은해하는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 '우리 둘째 딸에게도 이런 재능이 있었다니, 너무 반갑고 기쁘다.'라는 말을 듣고 싶다.
관심도 걱정도 모두 사랑의 일부분이다. 하지만 이젠 걱정보단 관심을 가져 주었으면...
나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길 원하는 첫째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엄마는 너 자체로서 사랑해. 네가 무엇을 잘해서 좋아하는 것이 아냐. 물론 네가 대회에 나가 상을 타면 기쁘지. 하지만 네가 피아노를 치고 콩쿠르에 나가는 것은 엄마 아빠를 위한 것이 아니었으면 해. 네가 음악을 하면서 기쁘고 행복하다면 그걸로 된 거야."
아이를 통해 대리만족 하고 싶지 않았다. 누구의 엄마란 호칭보다, 내 이름 그대로 불리길 바랐다. 지인들의 카톡 프로필 사진을 보다 보면 아이들이 학교나 다른 곳에서 상을 받아오거나, 아이들이 한 어떤 것들을 많이 보게 되는데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나로서 존재할 뿐, 자식의 어떠한 모습이 나의 모습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가끔 세 아이를 보다 보면 나와는 정말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에 신기하다. 유전적인 요소도 있겠지만, 아이들은 나와는 다른 독립된 개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아이의 말과 행동을 보면서 아이들이 누구의 자녀가 아닌 자신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 해야 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됐다.
자꾸만 내 생각을 주입하면서 내 생각만이 옳다고 주장할 수만은 없다. 내가 옳다고 믿는 삶의 방식이 있는 반면 아이들 또한 자신들만의 생각과 결정권이 있다. 하지만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들을 놓치지 않도록 도울 생각이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쓴다. 삶에서 중요한 것들을 놓치지 않으면서 고유한 나를 지켜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글을 쓴다. 엄마인 나부터 독립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팀의 리더와 같은 삶의 이끄미가 돼보려 한다. 누군가의 기대에 맞춘 삶이 아닌 주도적인 나로서의 삶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알려주고 싶다.
나는 좌절이나 절망보다는 희망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사소한 말 한마디로 상처를 주기보다는, 특별하지는 않지만 다정한 한마디로 힘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다. 나 또한 사소한 말 한마디로 상대에게 상처를 주거나 싸움으로 번진 적도 있었다. 반대로 상처를 받기도 했다. 상대의 말 한마디로 쓸모없는 존재, 필요 없는 존재로 나를 인식하기도 했다.
나를 찌르는 말들은 나를 포기하고 싶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젠 포기할 생각이 없다. 화가 날 땐 조금은 물러서고, 원하는 답을 듣지 못해도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내려놓는 연습을 하고 있다. 삶은 완성품이 아니라 완성으로 가는 과정이라 믿는다. 누구도 완성되지 않았다. 적어도 사람이라면 그렇다 생각한다.
돈이 많고 지식이 많아서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많이 가진 뒷면에는 알 수 없는 공허함이, 언젠가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다. 돈도 지식도 나눌수록 그 행복이 배가 된다고 믿는다.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나눌 수 있다면 이 세상엔 굶어 죽는 사람이 없을 것 같다.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딱히 설명할 수 없듯이 우리의 삶이 그런 것 같다. 혼자 있으면 외롭고 비난의 말을 들으면 자존감이 낮아진다. 물은 답을 알고 있다,라는 책에서 보았듯이 물도 사랑의 말을 들으면 물의 결정이 아름답게 변한다. 사람도 그렇다. 사랑의 말, 응원의 말을 들으면 고래도 춤을 추게 하듯 마음이 행복해진다. 어떤 일이든 다 해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쓴다. 조금 더 이로운 나가 되기 위해서 글을 쓴다. 어느 날 문득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그 이유는 가족도 자녀도 아니다. 딱히 죽을 이유가 없었다. 내게 주어진 삶을 원 없이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지 말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 순간 왜 그런 결심을 하게 됐는지 그 이유를 찾아보려 애썼지만 찾을 수 없었다.
주어진 삶이 감사했다. 언젠가 찾아올 죽음이 두렵기도 하지만 두렵다고 피하는 것보다 당당히 맞서는 것이 더 멋있겠다 생각했다. 아이돌이 '나는 충분히 멋져. 그러니 나는 두렵지 않아. 나는 당당해'하며 춤을 추듯 글을 써서 멋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글을 쓰는 사람은 참 멋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과 마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자신과 당당히 맞서지 못하면 글도 당당하지 못하다. 읽는 사람이 다 안다. 적어도 내 글 앞에선 기죽지 말고 당당했으면 한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멋짐을 뽐내려는 것이 아니라 조금은 더 이로운 내가 되기 위해서이다. 세상에 이로운 나로 섰을 때 빛을 발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