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가 주말 동안 콧물이 줄줄 흐르더니 쉴 새 없이 기침을 해댔다. 단순히 콧물이 뒤로 넘어가 기침을 하는 거라 생각했지만 밤이 되자 열이 났고 밤새 기침을 하느라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해열제를 먹이고 재웠는데도 아침이 되자 여전히 열이 내려가지 않았고 기침은 그치지 않았다. 그날은 일요일이었고 일요일에도 여는 병원을 찾느라 인터넷으로 검색해 이곳저곳 전화를 해 진료가 가능한지 알아봐야 했다. 아침 일찍 나갔다 들어온 남편은 바로 진료가 가능한 병원이 없자 답답해했고, 급기야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보리차나 꿀물 좀 타 먹이라니까 조끼 좀 입혀 재우라니까 말도 지겹게 안 듣네."
환절기라 감기로 병원에 찾는 사람이 많아 바로 진료를 볼 수 있는 병원을 찾지 못해, 미리 접수해 둔 병원 진료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진료시간까지 두세 시간이 남아 계속 이곳저곳 알아보았고 동네 가까운 곳에서도 일요일 진료를 보고 있어 급히 가보았지만 대기환자만 50여 명이 넘었고 이미 접수도 끝난 상태였다. 어쩔 수 없이 미리 접수해 둔 병원의 진료시간을 기다려야 했고, 나는 그동안 아이들 점심을 준비했다. 점심 준비가 끝나 시간이 약간은 여유로운 듯 해 점심 먹을까?라고 말하니 남편은 왜 지금 밥을 먹냐고 빨리 가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남편의 말에 서둘러 아이에게 점퍼를 입히고 가방을 챙겼다. 아이의 증상과 나의 굼뜬 행동들에 답답해하던 남편은 또다시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 "생활비를 주지 말아야지, 내가 답답한 만큼 너도 답답해 봐야지."
계속된 남편의 짜증과 비난의 말에 견딜 수 없었던 나는 남편에게 "화가 나고 답답하다 해서 왜 가장 중요한 생활비를 놓고 주겠다 안 주겠다 하는 거야? 생활비가 나에게 약점이라 생각해 쥐고 흔들고 싶은 거야? 아이가 감기 걸린 게 누구 탓도 아니야. 아이가 감기에 걸렸고 병원이 가까이에 있지 않으니 당신한테 같이 가달라 요청한 거야. 누구의 탓을 하는 게 아니라 우리는 부모니까 같이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고 같이 약 먹이고 밥 먹이고 돌보면 되는 거라고".
남편의 짜증이나 비난 섞인 말들이 어쩌다 있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욕구가 이뤄지지 않았을 때 언제든 나올 수 있었다. 퇴근하고 돌아와서도 주방 상태를 보며 잔소리를 하기도 한다. 겨울이라 찬기가 들어오지 않도록 베란다 창문을 잘 닫아야 하는데 냉장고가 베란다에 있어 왔다 갔다 하느라 대충 문을 닫으면 살짝 열리기 일쑤였다. 남편은 그런 작은 것 까지도 매서운 눈으로 살펴보며 10년을 이야기해도 변하지 않는다며 짜증을 부렸다.
겨울엔 내복을 입혀라, 잘 때 조끼를 입혀라, 내복을 입지 않아도 되는 계절에는 옷 속에 런닝을 입혀라, 안 입는 옷 좀 버려라, 창문 좀 닫아라.... 늘 변함없는 잔소리 레퍼토리다. 한 번 들으면 들어 처먹어야지.. 염병... 아무렇지도 않게 막말을 내뱉는다. 남편의 비난에 참을 수 없을 때 나 또한 늘 같은 말을 한다. "당신도 당신 하는 말 녹음해서 하루 종일 들어볼래?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도 고운 거야. 부정적인 말엔 부정적인 에너지가 간다고. 도대체 당신 기분에 어떻게 다 맞춰?"
그가 하는 말들을 꼭 그대로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언행에 내 기분은 바닥까지 내려가고 만다. 아픈 아이 옆에서 같이 자느라 자다 깨다 할 때도 피곤하지 않냐고 물어보지 않는다. 그때도 역시나 보리차 좀 끓여 먹이라니까, 우유 좀 데워 먹이라니까, 애 좀 잘 봐야지 뭐 하는 거야.라고 말한다. 나 또한 가뜩이나 몸도 피곤한데 이런 말 듣고 싶지 않아 남편을 깨우지 않으려 어떻게든 애를 다시 재워보려 애쓰는데도 남편은 자신만의 생각과 감정만이 중요할 뿐, 내가 얼마나 힘든지, 기분이 나쁜지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밀려오는 부정적인 감정과 생각을 아이들 생각해서 꾹꾹 눌러내고 참아본다.
남편도 어떤 악의가 있어 내게 이러는 것만은 아니다. 단지 자신의 말을 잘 듣고 그대로 행해주길 바라는 것이다. 몇 번이나 똑같은 잔소리를 해도 잔소리할 것들이 보이면 나와 아이들이 자신의 말을 무시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남편의 생각과는 달리, 집안의 세세한 것까지 신경 쓸 정도로 예민하지 않다. 문이 열려 있으면 닫으면 되고 아이가 아프면 병원에 데려가 약을 타와 먹이면 된다. 그때그때 일어난 상황에 맞게 대처한다. 누구 탓도 하지 않는다.
특히 남편은 건강에 예민하다. 늘 자신의 방안에 상비약을 구비해 놓는다. 아침저녁으로 혈압을 재고 몸이 안 좋을 때마다 병원을 찾는다. 속이 더부룩한 것 같으면 내과에 가고 어깨가 아프면 정형외과에 간다. 아이가 아플 땐 더 마음이 쓰이는지 마치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린 것처럼 낙담하는 듯 보인다. 아이가 감기에 걸린 것이 엄마인 내가 보리차를 끓여먹이지 않고 밖에 나갔을 때 마스크를 씌우지 않고 춥게 입혀 돌아다녀서라고 생각한다. 엄마의 부주의로 아이가 아픈 거라 말한다.
아이가 아프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만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만은 없다. 아이의 감기까지 어떻게 걸리지 않도록 할 수 있는지. 예방은 할 수 있겠지만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를 상대로 무조건 막아낼 수 있겠는가. 어딜 가든 사람들이 있고 어린이집에서 공동생활을 하다 보면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게 내 생각이다. 한 번씩 마른기침을 하는 셋째를 위해 어린이 한의원도 가보고 한약도 먹여보고 집안에 공기청정기나 공기살균기를 들여놔도 감기를 피할 수 없었다.
아이가 아플 때마다 단순 감기여도 남편과 내가 받아들이는 관점이 다르다. 남편은 기침의 횟수가 잦지 않아도 한 번의 기침으로도 바로 치료해야 할 증상으로 생각한다. 증상의 강도 또한 받아들이는 느낌이 다를 뿐만 아니라 걱정거리 또한 다르다. 자주 반복되어 온 아이의 기침으로 한의원이나 소아과를 자주 가보았지만 그 증상이 딱 멈추고 사라져 버리지 않았고 아이는 반복적으로 약을 섭취해야 했다. 계속된 양약의 섭취로 자주 먹게 되면 좋지 않을 거라 생각한 남편은 "언제 까지 약 먹일 거야? 보리차나 꿀물 따뜻하게 해서 자주 먹이라고 했잖아."라고 말했다.
남편은 따뜻한 물을 자주 마시면 감기에 예방이 될 거라 생각해 엄마인 내가 아이에게 챙겨주길 바라는 것이다. 나의 입장으론 어떤 것이든 함께 해주길 바라는 것이다. 보리차나 꿀물을 마신다고 감기가 안 걸리는 것은 아닐 것이고, 그것이 아이에게 좋다고 생각되면 본인이 챙겨주었으면 한다. 본인의 요구까지 다 들어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모든 것을 나에게 떠민다는 생각이 든다. 보리차나 꿀물이 좋다는 사실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남편의 요구나 명령이라 생각되어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단지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때 남편의 기분이 상해 화를 내는 등 스트레스를 나에게 풀 것을 생각하면 머리가 어지럽고 몸이 축 처진다.
어디를 갈 때에도 항상 아이들 옷이나 물건들을 엄마인 내가 무조건 다 챙기는데 때론 챙김이 버겁기도 하다. 챙김의 몫이 엄마의 것만은 아닌데, 늘 돈을 벌어오는 것과 살림을 하는 엄마로서의 역할이 다르다 생각해 온전히 다 내 몫이 되어 버린다. 남편이 아이들 문제와 살림 상태에 화가 나는 이유는 당연한 엄마의 몫이기에 제대로 하지 못하면 자신의 말을 듣지 않거나 무시하는 거라 느끼기 때문이다. 나는 남편과 내가 부모로서 당연히 살림도 육아도 같이 해야 한다 생각하지만 돈을 버는 것과 비교하면 당장 돈을 벌 수 없는 나는, 엄마만의 역할이 아니라 함께 해야 한다는 말을 하지 못한다.
아이에게 기침이나 콧물 등의 증상이 보일 때 남편은 특히 더 예민해진다. 계속 코를 풀다 보면 코 밑이 헐거나 피부가 까칠해지기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남편은 "지엄마가..." 이런 식의 표현을 자주 쓴다. 엄마 닮아 비염이 심하고 엄마 닮아 지저분하다,라는 식으로 말을 한다. N(직관)이 강한 나는 지금의 모습을 걱정하며 탓하기보다는 피부가 까칠하면 보습제를 바르면 되고 콧물이나 기침이 심하면 병원에 데려가면 된다고 생각한다. 어려서부터 감기 정도는 가볍게 여겨 약도 잘 먹지 않았던 나였기에 아이의 증상을 보고 걱정이 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병원에 가면 되기 때문이다. 아이가 면역력이 약해 감기에 자주 걸리는 거라면 영양제나 한약 등 필요한 것들을 아이에게 해주면 된다. 그것이 효과가 없다 해서 화가 나거나 괜히 샀다는 후회도 하지 않는다. 또 다른 가능성이 있는 것들을 찾아보면 된다.
그러나 S(감각)가 강한 남편은 지금, 현실에 초점을 맞추어 지금 증상이 왜 이렇게 나타나는지 알고 싶어 한다. 거기에 T(사고)가 있어 자신이 알고 있고 경험한 것이 맞는지 틀리는지에 강한 신념이 있다. 자신이 맞다고 생각하는 것은 반드시 상대 또한 그대로 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수용받지 못했다 생각해서인지 말 좀 잘 들으라며 화를 낸다. 감기예방에 따뜻한 물이 좋다고 생각되면 엄마로서의 역할을 갖고 있는 내가 그렇게 해줘야만 한다. 남편이 생각하기에 엄마란 아이들을 챙기고 집안을 돌보는 사람이기에 당연히 자신이 아닌 아내가 해야 되는 것이다. F(감정)가 강한 나는 어떤 일이든 어떤 상황이든 상대의 기분이 중요하기 때문에 내가 원치 않는 일이어도 거절을 잘하지 못하고 느낌을 잘 표현하지 못한다.
감기 예방이나 감기에 걸린 아이를 돌보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은 남편의 원칙이나 통제에 따라야 할 때이다. 원치 않아도 남편의 기분을 살펴가며 행동해야 할 때나 의견에 따라야 할 때 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됨에 따라 로봇이나 나무토막이 된 느낌이다. 나의 느낌이나 생각을 표현했을 때 남편은 "그럼 내가 잘못이네?" 하며 짜증이 섞인 어조로 말을 한다. 나는 누구의 탓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의 상황을 해결해 나가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한다. 삶에는 다양한 변수가 있기 마련인데 아무 일 없이 평화로울 수만은 없다. 남편은 나만의 생각만이 옳다고 믿고 자신이 원하는 그대로를 행해주길 바라지만 각자의 생각과 의견이 있기에 무조건적으로 남편의 생각만을 따를 수는 없다.
남편의 이야기 조각들을 맞추어 보면, 상대가 느끼기엔 명령처럼 들리는 말이지만, 자신이 지시한 대로 상대가 행하면 그것으로 인해 수용받은 느낌이 들어 계속해서 상황을 통제하고 싶은 것으로 보인다. 아이들에게도 엄하게 말하고 매로 다스려야 말을 잘 듣는다고 했던 남편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 그대로 했을 때 그것이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는 거라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마음에 귀를 기울여주는 것과 자신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그 개념을 바꿔서 생각해 본다면 남편의 언행이 좀 더 부드러워지지 않을까.
NF기질을 갖고 있어 상대의 감정이 틀어짐을 견딜 수 없었던 나는 남편의 기분에 따라 남편이 원하는 대로 하다 보니 우유부단해짐을 느낀다. 물건을 고를 때에도 결정을 잘 내리지 못하고 이리보고 저리 보며 시간을 허비한다. 정말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무엇인지 헷갈리기도 한다. 이것도 좋아 보이고 저것도 좋아 보이는 이유가 나의 생각이나 느낌, 결정에 대해 존중받고 수용받은 경험이 거의 없어서이기도 하다.
원하는 옷을 입기보다 엄마가 사 온 옷을 입었고 원하는 것을 가족이 함께 해왔던 경험이 부족해서일까 원하는 것을 말하기가 어렵다. 이런 성장과정이 나의 성격유형에 영향을 주었다. 계획적이면서도 즉흥적이다. 무엇을 결정할 때 나의 의지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생각을 고려하게 된다. 고려한다 해서 상의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결정에 상대방이 불편해할까 우려한다. 완전한 결정을 하기까지 상대의 감정을 생각해 보느라 시간과 감정을 허비하곤 한다.
수용받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으로 자신의 생각을 강하게 밀어붙이게 된 판단형(J) 남편과 자신의 결정에 상대가 불편해할까 두려워 인식형(P)이 된 아내가 만났으니, 마치 종속관계인 것처럼 느껴진다. 이런 유형들이 태어날 때부터 결정된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자라온 환경과 부모님의 양육방식이 고스란히 옮겨온 결과이기도 한다. 그러므로 성격유형으로 좋다 나쁘다 평가를 할 수 없다. 성격유형검사를 통해 성격 유형이 만들어진 배경을 알아감으로 자신을 깊게 알아갈 수 있다. 나와 다른 상대를 만났을 때 자신과 맞지 않아 비난하기보다 나와는 다른 상대를 이해해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결혼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서로를 알아감으로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고 보듬어 연민으로 상대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다름은 틀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