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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탓이 아니야

MBTI로 풀어보는 부부 이야기 2

어느 날 밤 아이들을 재우기 위해 방에 들어가 이불 위에 누워있는데 정체 모를 남편의 소리에 거실로 나가보니 남편이 피를 뚝뚝 흘리며 휴지로 손을 감싸고 있었다. 생각보다 많은 피를 흘리고 있어 깜짝 놀랐지만 아이들이 충격을 받을까 봐 침착하게 남편의 손에 붕대를 감고 피를 흘린 바닥을 닦았다. 큰인이 아닌 것처럼 침착하려 했지만 아이들이 놀라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큰 아이는 이불에 누워 울기 시작했다. 나는 남편이 병원에 간 사이 놀라 우는 큰아이를 안아주며 "많이 놀랐지? 엄마도 놀랐어. 그런데 아빠 피는 많이 흘렸지만 많이 다치지는 않았어. 아빠 치료받으러 갔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라고 말했다.


남편은 병원에 가기 전 붕대를 감은 손을 위로 올리고 누워 "에휴, 헛짓거리 하다 다쳤네. 내 잘못이지."라고 말했다. 나는 남편에게 왜 당신 잘못이야?라고 말하려다 "많이 놀랐지? 괜찮아?"라고 물었다. 남편이 계속해서 헛짓거리 했다 말하자 어떻게 다친 거냐고 물었다. 평소 골프를 치고 싶어 했던 남편은 자신의 방에서 돌돌이 테이프 클리너 봉을 골프채 삼아 휘두르다 손잡이 윗부분이 빠져 다시 고정시키려다 왼손 엄지 손가락 밑을 크게 베였다. 그 바람에 이불 위에 피를 흘렸고 얼른 거실로 나와 대충 휴지로 막아보려다 도저히 혼자 힘으로 처리할 수 없어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남편은 헛짓거리 하다 다쳤다며 만약 내가 그렇게 다쳤다면 화를 냈을 거라고 했다. 자신의 잘못으로 다친 것이기 때문에 남편은 창피해 소리도 지르지 못했다. 사고란 예상치 못하게 다가오는 것이기에 어쩔 수 없는 것이고 그걸 자신의 탓이라 생각하기보다 다음에는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은데 남편은 그렇게 피를 흘리는 상황에서도 놀라기보다 자신의 탓을 먼저 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한편으로는 남편이 어린 시절 실수를 하거나 다쳤을 때마다 부모님이 혼을 내셨던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어린 시절 엄하고 꼼꼼한 아버지와 쾌활하면서도 가족을 위해 늘 애쓰셨던 어머니 밑에서 자란 남편이었다. 그런 남편에게 아버지는 무서우면서도 존경스러웠을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인생보다 가족들을 위해 일하며 살아오셨던 부모님이셨기에 남편은 부모님에게 도움이 되는 아들이 되고 싶어 했다. 농사를 지으시는 부모님을 도와드리는 것이 당연했고 하루종일 일하고 오시는 부모님을 힘들게 하지 않기 위해 착한 아들이 되어야 했다. 부모님이 늦으시는 날에는 혼자 밥을 해 먹어야 했고 부모님께 짐이 되지 않도록 되도록이면 원하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특히 엄한 아버지 셨기에 혼나는 것이 두려워 솔직하지 못했다.


어쩌면 지금 우리의 모습이 남편의 어린 시절 시부모님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자신의 생각이나 논리가 중요한 남편과 시아버지는 ISTJ로 상대의 감정을 먼저 살피지 않고 일을 처리하기 때문에 F와 P유형을 가진 시어머니와 나에게는 냉정하게 느껴지는 말들이 상처가 되었다. 자신이 결정을 내렸더라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았으면 좋았을 텐데, 배려나 따뜻한 말 한마디가 그립고 아쉬웠다. 상대의 기분과 결정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하지 않거나 바꿀 수 있기에 상대의 결정에 무조건 따랐다. 그렇기 떄문에 어머니는 내게 참아야 한다고 자주 말씀하셨던 것으로 보인다.


받을 자를 대고 갈 정도로 꼼꼼하고 철두철미 했던 아버지와 아머지의 성격에 맞추려 잠고 살아오신 어머니를 상상해보았다. 어머니 형제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어머니는 결혼 전 여장부 같은 성격의 활발하고 쾌활한 여성이었는데 지나온 세월 동안 시부모님과 엄하고 꼼꼼한 남편과 함께 살아내시느라 자신보다 가족이 우선이 되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이들의 울음소리도 듣기 힘들어하셨던 아버지 셨기에 아이가 울면 업고 바로 집밖을 나가셨다는 이야기까지 전해 들으니 지금 우리의 갈등 문제와도 겹쳐져 보였다.


그래서 어머니의 성격이 세월이 지나면서 변화가 되었을까 싶은데 어머니의 쾌활하면서도 사교적인 부분은 지금의 내가 보기에 그대로인 듯하다. 어느 명절 날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어머니는 같이 다과를 먹으며 "자꾸 호통이나 화를 들으며 사니까 소심한 사람이 됐어."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에 작은어머니와 큰 어머니는 공감을 하시는 듯 어머니를 바라보셨다. 여자로서 집안을 돌보고 음식을 만들며 참고 사는 것이 이 집안 내력이라고 말씁하셨던 어머니였다. 아들 부부의 결혼생활이 위태한 듯 보였을 때 어머니는 내게 잘 참고 살아야 한다, 어쩌겠니라고 말씀 하셨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긴 세월 동안 많이 아프고 힘드셨던 것 같다.


남편에게는 그런 어머니가 자신의 아내로서의 이상형이었고 여자라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혼 후 남편은 내가 착해 보여서 결혼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자신만 아는 이기적인 사람으로 보였던 것이다. 내가 생각한 결혼의 이상적인 모습은 부부가 하루를 마무리하며 차를 앞에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남편은 나와 달리 여자로서 엄마로서 아내로서 며느리로서의 모습을 기대했던 것 같다. 사람과 사람으로 만나 인생의 동반자로서 앞날을 같이 계획하고 하루를 정리하는 그런 모습이 아니라 가족들에게 헌신하는 모습을 바랐던 것이다. 어머니는 가족들에게 되도록이면 욕구와 느낌을 표현하고 살지 않으셨고 남편은 순종적이면서도 헌신적인 어머니의 모습과 아버지의 화난 모습 그리고 가부장적인 모습을 보며 자라왔기에 어머니가 어떤 고충을 가지고 살아오셨는지 알지 못했다.


지금도 남편은 어머니의 힘듦, 아버지의 힘듦을 따로 보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살아오신 부모님을 동시에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런 부모님께 불만을 갖거나 연민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도움이 되고 싶어 하는 듯 보인다. 그것을 책임감이라 부를 수도 있지만 바쁘셨던 부모님이었기에 함께 소통하는 시간을 보내지 못해 그 비어진 부분을 채우려 계속 부모님과 함꼐 하고 싶은 것 같다. 분명 아버지는 무서웠고 다가가기 힘든 사람이었는데 자신도 모르게 그런 부모님의 모습을 닮아갔고 나이가 드신 부모님을 도와드리며 함꼐 시간을 보내려는 것 같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같은 현실을 바라보고 살아오셨고, 그것 또한 부모님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무엇이든 자신만의 논리로 단호하게 행동하셨던 아버지와 농사일과 집안일에 가족들까지 챙겨야 했던 어머니는 같은 방향을 바라보면서도 관계를 바라보는 시선은 달랐을 것이다. 어머니는 농사일에 집안일까지 누구보다 마음과 몸이 분주했다. 거기에 아이들까지 뒷바라지해야 했으니 얼마나 고달팠을까 생각해본다. 그런 어머니를 누구보다 남편이 잘 알았기에 어머니께 살갑고 착한 아들이 되려 헸을 것이다.


부모님이 서로 다른 성격유형으로 부딪히는 부분들이 많은 만큼 서로 맞춰나가는 시간도 그만큼 길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자신의 경험과 논리대로 해야 편안한 아버지에게 맞추며 살아오셨고, 아버지 또한 장남으로서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책임감에 늘 어깨가 무거웠을 것이다. 남편은 아들로서 그런 상황을 받아들여야 했고 부모님에게 자신까지 짐이 되지 않으려 애쓰며 살아왔을 것 같다. 나는 남편에게 당신이 다친 건 실수이지 당신 탓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부모님의 삶은 부모님의 것이고 자녀의 삶은 자녀의 것인 것처럼 자신의 실수 또한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잘못이 아닌 다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으로 말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탓하기 이전에 자신을 돌볼 수 있기를 바란다.


'당신 탓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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