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가족들과 쇼핑몰에 갔을 때의 일이다. 쇼핑몰에서 다 같이 구경을 하고 점심을 먹었다. 구매한 것을 계산하고 나와 아이들이 먹을 아이스크림과 어른들이 마실 커피를 사고 있던 중 아빠가 엄마에게 빨리 가자며 재촉하셨다. 헤어지기 아쉬운 마음에 커피 마시고 가시라고 말씀드렸지만 아빠는 급한 일이 있는 사람처럼 빠른 걸음으로 주차장으로 가셨다. 엄마는 아빠의 재촉에 하는 수없이 간다, 하시면서 아빠의 뒤를 따라가셨다.
어렸을 때도 아빠는 늘 마음이 급한 사람이었다. 어디를 가면 진득하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가 답답한 사람처럼 급히 집으로 향했다. 가족들과 걸을 때도 늘 앞서 걸으셨다. 어렸을 때도 그랬고 급히 쇼핑몰을 빠져나가셨을 때에도 아빠를 이해하지 못했다. 바쁜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도 빨리빨리를 외치며 가신 아빠가 내심 미웠다. 그런 아빠에게 좀 있다 가자는 말도 못 하는 엄마도 답답했다. 분명 엄마는 우리들과 커피를 마시며 좀 더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셨는데 아빠는 엄마에게 의사도 묻지 않으시고 그렇게 가버리셨다.
엄마의 건강을 누구보다도 걱정하고 신경 쓰셨던 아빠였기에 아빠가 그동안 엄마에게 의견을 묻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아빠는 원래 급한 사람이었지,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부모님을 보면 아빠가 엄마를 많이 아끼고 배려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다. 글을 쓰기 위해 부모님의 모습을 자세히 관찰하다 보니 엄마는 단 한 번도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느끼시는지 아빠에게 말씀을 분명하게 하신 적이 없으셨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아빠의 행동에 화가 나 짜증을 내기는 하시지만 자신의 욕구와 느낌을 말씀하시지는 않으셨다.
마셜 로젠버그의 비폭력 대화에 이와 비슷한 사례가 나온다. 저자의 어머니가 여성들이 자신의 욕구를 표현하는 데 얼마나 두려움을 느끼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임에 참가했다가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 받아들이기가 아주 힘든 사실이었다. 저자의 어머니는 지난 40여 년 동안 자신이 원하는 것을 남편이 들어주지 않아서 화가 났는데, 자신이 원하는 것이 정작 무엇인지 남편에게 단 한 번도 분명하게 말한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사례를 보고 나니 엄마 역시도 아빠에게 분명하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아빠는 젊으셨을 때 엄마와 상의도 없이 집과 차를 사고팔기를 잘 하셨다. 그래서 우리 집은 이사를 자주 해야만 했다. 엄마와 상의를 하셨던 적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건 상의라기보다 통보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일이 있었을 때마다 엄마가 아빠에게 크게 화를 내시곤 하셨기 때문이다. 그땐 그것이 부모님 사이에 큰 문제가 되는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부모님이 그 문제를 가지고 논의하시거나 아빠가 즉흥적으로 한 것에 대해 엄마에게 사과를 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부모님 사이에 갈등이 있었지만 그 갈등을 해결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게 부모님 사이가 좋아 보였다.
친정 부모님 댁에 갈 때마다 나는 엄마의 무기력해 보이면서도 불만스러운 표정을 발견한다. 이제는 그 표정의 의미를 알 것 같다. 말하지 못해 답답해 보였다. 답답함을 참아내느라 얼마나 힘드실까 생각해 보았다. 그 마음을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으니 엄마 본인조차도 말하지 못해 생긴 답답함을 알지 못하고 계신 걸까. 대신 엄마는 언니의 집을 가면서 그 답답함을 해소하고 계신 것 같았다. 그동안은 아빠 엄마가 대화를 잘 나누셨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관찰을 해보니 부모님의 대화에서도 마찬가지로 욕구와 느낌에 대한 이야기는 빠져있었다. 본인들에 대한 이야기보다 주변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ISTJ인 아빠는 모든 것을 신속하게 처리해야 마음이 편한 사람이었다. 마음에서 결정이 되면 빨리 해치워야 했던 것이다. 엄마와의 상의를 먼저 생각하지 못하고 마음의 결정을 행동으로 옮겨야 했다. 지금은 집이나 차를 사고팔기를 하시지 않으신다. 이제는 부모님이 지금 사는 집을 마지막으로 생각하시고 게시기 때문에 더 이상 이사를 가지 않으신다. 아빠의 급함은 본인이 편하지 못할 때 나온다. 예를 들어 자식들과 손주들이 집에 와 엄마가 요리를 하느라 음식 냄새가 집안에 가득 찰 때 날씨에 상관없이 아이들이 추운 것을 생각지 못하고 갑자기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신다. 하루 밤을 부모님 집에서 자고나면 얼른 가라고 재촉하시기도 한다.
INFP인 엄마는 그런 아빠를 맞춰 살아오셨다. 아빠에게 화를 낼 때도 있었지만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 분명하게 말씀을 하시지는 않았다. 엄마는 엄마만의 일상 루틴이 있지만 주로 아빠와 언니에게 맞춰져 있다. 언니의 요청이 있을 때마다 조카를 돌보러 언니의 집에 가신다. 언니의 집에 가기 전 아빠가 일터에 가져가 점심으로 드실 반찬들을 만들어 출근 일수에 맞게 반찬을 담은 통을 냉장고에 넣어 두신다. 언니의 요청이 없으면 엄마는 주로 집에 계신다. 아빠가 출근했다 돌아오실 때까지 집안에서 엄마 자신만의 시간을 보낸다. 요즘엔 아이들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교재를 구입해 공부를 하신다. 아이들이 무엇을 공부하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또 알려주고 싶어 공부를 하신다. 감정형(F)의 특성을 가진 엄마는 항상 가족들을 궁금해하면서 도움이 되고 싶어하신다. 사람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조화로운 생활을 추구하기 때문에 가족과의 관계에서도 협조하려고 하신다.
반복되는 일상을 보면 계획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가족들의 요청에 따라 움직이시기 때문에 자신보다는 상대에게 맞춰진 삶을 살고 계신 것 같다. 현실적인 감각형이신 것 같기도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엄마는 직관형이자 감정형 이신 것을 알 수 있다. 새로움을 추구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지만 본인에게서 찾는 것이 아니라 자녀들이나 손주들에게서 찾는다. 손주들이 무엇을 공부하고 무엇을 하는지 궁금해하신다. 특히 새로운 것을 배운다 했을 때 어떻게 배우게 됐는지에서부터 어떤 평가를 받는지까지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하신다. 엄마가 경험하지 못하는 것들을 자녀들이나 손주들을 통해 이야기로나마 듣고 싶어 하시는 것 같다. 또한 엄마만의 규칙이나 기준이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어떤 일에 반대를 하다가도 이야기를 들어본 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수용하신다.
그동안 아빠에게 맞춰 살아오신 엄마였다. 그런 엄마가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앉아있으면, 그런 모습을 보고 싶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론 안타깝기도 하다. 본인 스스로 환경을 개척하고 변화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임하시기보다는 정해진 틀 안에서 자신의 감정을 누르고 살고 계신 것 같아 마음이 좋지만은 않다. 그것 또한 가족을 위한 엄마의 마음인것을 알지만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보이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 속상하기도 하다. 엄마가 자기자신보다 가족들을 위하며 살아오신것은 기질 때문인 것일 수도 있지만 가족이 화목해지기 위한 엄마의 애씀이었다는 것을 안다. 그래도 요즘엔 영어 공부도 하시며 작은 일상의 변화를 만드신 것 같다. 손주들을 궁금해하고 알려주고 싶은 마음으로 공부를 시작하셨다 했지만 그것을 계기로 공부를 하며 엄마만의 행복과 즐거움을 찾으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