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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교수를 교수야, 불렀다. 그는 아들을 그렇게 부르는 것이 좋다고 했다. 네가 교수가 된 게 참 좋다 나는.
"이게 다 뭐냐."
종일 대체로 조용히 지내는 어머니가 자고 있는 교수를 깨우는 일이 다 있었다. 어머니는 교수의 눈앞에 휴대폰을 들이밀었다. 화면이 쏘아대는 밝은 빛에 얼굴이 한껏 일그러진 교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영상 속에는 국회 앞에 모인 사람들이 소리치고 있었다.
"이 사람들은 왜 저길 못 들어가게 막고 있냐, 이거 또 뭔 사고 나는 거 아니냐."
이게 어떻게 민주주의 국가냐며 언성을 높이는 사람들 사이로 기자와 카메라가 여럿 보였다. 교수는 베개 아래서 휴대폰을 꺼내 연락과 뉴스들을 확인했다.
"어머니, 계엄이래요. 계엄을 선포했대요."
"계엄이면 우리 이제 어떻게 되는 거냐, 교수야, 너는 아무것도 하지 마라. 나만 남겨두지 마라."
교수는 내일이면 서울로 올라가 다음 학기 강의 자료를 모으고 계획해야 했다. 몇 달간 방치된 서울 집도 정리할 생각이었다. 어쩌면 그런 것들은 불가능의 영역으로, 밥 먹고 청소하고 잠을 자는 것이 어려워질 수도 있다. 무엇도 중단되지 않고 여느 때처럼 하루를 일궈 나갈 수 있을까. 시간이 늦어 어머니를 달래 재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를 안방으로 돌려보냈지만 교수는 잠을 잘 수 없었다. 생각이 그를 더 피곤하게 만들고 있었지만 생각의 고리가 끊이지 않았다. 계엄사령부는 절차 없이 순식간에 포고령을 선포했다. 포고령에는 이런 문장이 들어 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거나, 전복을 기도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하고(…). 이것이 자유민주주의 안에서 가능하다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모순되는 문장이었다. 이곳은 더 이상 자유민주주의국가가 아니라는 말이었다. 군경을 동원해 국민을 감시하고 통제하겠다는 것은 우리가 이룩한 민주주의가 아니다. 이래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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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22일, 교수는 독일 제1공영방송뉴스를 통해 광주 학살을 목격했다. 교수는 독일어를 익히기 위해 매일 저녁을 먹고 교회 목사의 집으로 향했다. 그곳엔 TV가 있었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 교수와 같이 유학 중인 사람들이 모여 타게스샤우Taggesschau를 함께 보았다. 교수와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젊은 사람들이 군용 트럭에 총을 들고 올라타 있었다. 한 무더기의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보였고 헝클어진 자세로 바닥 이곳저곳에 널브러진 시신들이 보였다. 군복을 입지 않은 시민들이었다. 그들은 엎드려서, 웅크려서, 드러누워서 바닥에 붙어 있었다. 이제는 중력을 조금도 거스르지 못할 터였다.
누군가 탄성을 뱉었고 대부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TV 옆 장식장에 들어찬 십자가와 예수상이 묵묵히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목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 겸 침실로 들어갔다. 그곳은 낮에 아이들이 한글과 독일어를 공부하는 곳으로 쓰이고 있었다.
목사는 종이 뭉텅이와 펜을 몇 자루 가지고 나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우리도 함께 합시다, 목사가 말하며 종이를 앞앞이 나눴다. 제가 독려글을 작성할 테니 읽어 보시고 따라서 작성해 주세요. 이들은 5월 30일 금요일에 모이자는 초청장을 함께 적었다. 장식장 안에서 예수가 그들을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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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울엘 왜 가냐."
교수는 어머니께 서울에 함께 가자고 했지만 힘없는 어머니를 오래 차에 앉혀두는 것이 걱정이었다. 하지만 역시나 어머니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희수 온다고 했다. 걱정 마라, 연락이나 자주 하고. 조심해라."
교수는 동생이 어머니를 보러 온다는 말에 확인 차 동생과 통화를 마치고 서울로 떠날 수 있었다.
어머니는 서울을 싫어했다. 지수 아주머니를 따라 서울에 갔을 때, 이래선 안 된다며 지수를 돌려내라는 지수 아주머니와 함께 서울에 갔을 때, 대학생들을 붙잡고 지수를 아느냐고, 그날 혹시 같이 있었냐고 묻는 지수 아주머니를 볼 때, 지수 아주머니가 터미널에서 엉엉 울며 이대로 갈 수 없다고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릴 때, 그를 끌어안으며 온몸이 흔들릴 때, 어머니는 서울이 싫어졌다. 어쩌면 한국이 싫어졌다. 어쩌면 삶이. 그가 어딜 가든 슬픔이 스며들 것이기 때문이었다. 떼어놓을 수 없는 슬픔이 양분처럼 온몸에 퍼져나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살아있는 동안 끈적하게 붙어 그것이 곧 삶이고 삶이 곧 그것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교수가 독일에서 쓴 논문을 번역해 발표하고 출판사에 다니는 동안 교수보다 열 살 어린 지수는 서울의 대학에 합격했다. 형님형님 하며 졸졸 쫓아오던 때가 어제 같은데 교수보다 한 뼘 정도 더 큰 키로 마당에 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지수 아주머니는 귀한 분이 왔다며 교수 가족을 맞이했다. 지수는 김장한 지 얼마 안 된 김치와 한 솥 삶은 수육을 내어 오며 맛있게들 드시라고 했다. 이리 와, 잠깐 앉아. 교수의 부름에 그가 성큼성큼 걸어와 앉았다. 저도 형님처럼 더 넓은 세상 가서 더 많이 보려구 합니다. 그 말에 교수는 가슴이 답답했다. 아는 것이 많지 않을뿐더러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하지 못한 자신을 뉘우쳤다. 내가 뭘 안다구. 교수가 술잔을 들며 말했다. 고개를 돌려 술을 마시는 지수의 온화하던 얼굴은 찌푸려졌다. 교수는 웃으며 그에게 고기 접시를 밀어 놓았다.
사라졌던 지수는 봄이 오자 돌아왔다. 기우뚱한 걸음으로 짐 하나 달린 듯 왼 다리를 끌며 동네에 나타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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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는 한껏 웅크린 채로 국회의사당 계단을 올랐다. 몸이 좋지 않았다. 스피커에서 나오는 노랫소리와 사람들의 구호가 머리를 울렸다. 교수도 오는 길에 받아 든 피켓을 들고 조금씩 구호를 따라 외쳤다. 목소리를 내니 몸이 떨리는 것이 덜했다. 교수는 더 크게 외쳤다. 탄핵하라, 탄핵하라, 탄핵하라.
군사독재 물러가라 외치던 1980년의 베를린으로 되돌아온 것 같았다. 교수가 몹시 몸을 떨자 옆자리에 있던 시민이 따뜻한 물이 담긴 보온병을 건넸다. 저는 텀블러가 많아서 괜찮아요. 가지고 가세요. 뚜껑을 열자 교수의 안경에 김이 서렸다. 떨리는 손으로 안경알을 대충 비벼 시야를 확보하고 뚜껑에 뜨거운 물을 받아 천천히 식혀 마셨다. 온몸에 온기가 퍼졌다. 몸이 휴식하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아 한껏 웅크린 몸을 감싸며 인파 속을 빠져나왔다. 그는 몸을 덜덜 떨며 운전대를 잡았다. 히터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멋대로 켜진 라디오에서는 리스트의 리베스트라움이 흘러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