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시집

순자 일기

by 조연지

갑판에 난간을 붙잡은 할머니가 있었다

그는 나를 보고 순자야 순자야 불렀다

그러다가 치마를 들추고 쪼그려 앉아 볼일 보는 자세를 했다

그를 일으켜 아들에게 데려다주었다

할머니 이름이 순자였다


고무줄 치마가 파도를 따라 출렁거렸다

나는 숨죽인 채 그들을 지켜보았다

술 마시는 사람 잠자는 사람 오줌 지리는 개

치마가 살금살금 올라올 때까지

떠나는 배보다 돌아오는 배가 조용하니까


순자야, 나는

뒤돌아보며 일어섰다

실수로 손을 벤 사람처럼

나쁜 짓을 들킨 사람처럼


치맛단이 발목에서 찰랑거렸다

순자는 내 손을 꼭 붙잡고 가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나는 개처럼 벌벌 떨었다

돌아갈 수 없는 곳이 자꾸 생겼다


순자는 옆구리에 끼고 온 밀폐용기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뚜껑을 열었다

세모나게 자른 샌드위치가 차곡차곡 들어 있었다

순자가 하나를 꺼내 내게 건네자

옆에 있던 하나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출렁이는 몸으로 먹었다

순자도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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