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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유나 Aug 25. 2022

반죽을 치는 것처럼 살아요

오롯한 시간을 위해

   아침마다 선식을 먹고 있다. 어려서부터 미숫가루를 좋아했다. 엄마나 할머니가 믹서에 우유와 꿀, 미숫가루를 넣어 갈아준 것을 마시면 더위와 배고픔이 가셨다. 지금은 두유로 타 먹어야겠지만 애인은 물에 타 먹는 것이 좋다고 한다. 마침 냉장고에 두유가 없어서 요즘엔 물에 타 먹고 있다. 두 명이 마실 양의 가루와 물, 갈색설탕을 넣고 얼음과 함께 갈면 금방 맛있고 든든한 음료가 된다.


   엄마가 언덕 아래 있는 방앗간에서 미숫가루를 지어 비닐봉지에 불룩하게 담아왔는데도 그것을 만드는 과정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지금은 미숫가루가 찹쌀을 볶아 갈아낸 것이라고 알고 있으며 알고 나서부터는 더 배부른 기분을 느끼고 있다. 나는 종종 이미 이름 붙여진 것에 대해, 혹은 어떻다고 알려진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지 않는다.

   ‘욜로’라는 말이 막 생겨나던 시기에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을 것처럼 하고 싶은 것들을 욕심내서 하려고 했다. 내가 다닌 여행들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중에 돈을 갚아야 하는 내가 있는데, 미래의 나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다녀왔다. 그 당시에는 갖고 싶은 것을 갖지 못하고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면 속이 아팠다. 사람들이 행복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좇고 있었다. 그것을 왜 하고 싶은지 고민해보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마치 내 것인 양 믿고 있었다.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 싫어서 금방 결정하려고 할 때에는 손쉬운 해결책이었고 책임을 회피하기에는 좋은 변명이었다. 여전히 남들과 나를 비교하며 무엇이 효율적이고 경제적이며 행복한 것인지 따지기를 한다. 이 버릇이 나를 스스로에게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게 하고 스트레스를 준다.

   깊이 파고들어 본 것이나 몸으로 경험한 것은 더 오래 남는다. 나는 몸을 사용할 때 오롯한 시간을 갖는 것 같다. 자전거를 탈 때, 도자기를 빚을 때, 요리를 할 때, 피아노를 칠 때, 글을 쓸 때. 모두 손이나 발을 사용하는 것이다. 어떤 시간은 세계에 대한 지각이 없는 상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나를 더 깊이 이해하거나 정의하지 않아도 된다. 비로소 평정 상태가 찾아온다.


   내가 사용하는 말 중에 찬사로 사용하는 단어가 있다는 것을 애인이 말해줬다. 네가 생각하는 순수함이 뭐야? 애인이 물었다. 그것을 정의하고 설명하려 애썼던 기억이 난다. 순수하다는 표현은 무의식 중에 내 안에서 가장 큰 미덕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순수함이 귀한 이유는 그것이 오래가지 않기 때문이다. 지식을 학습하거나 사회화하면서 우리들은 성숙해지는 거라고 믿지만 동시에 바래지는 것도 있다. 무지한 상태가 사라진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기 어렵고 아는 것에 관해서는 자랑하기 바쁘다. 또한 다른 사람의 안부나 마음을 과소평가하게 되기도 한다.

   몸을 움직이는 일 중에서도 무언가를 만드는 일은 순수함에 머무르려는 행위 같다. 피아노를 치는 일은 악보를 이해하고 건반을 누르는 손가락의 순서를 익히며 하나의 곡을 완성하는 것이다. 글 쓰는 일은 타인과 나의 안위를 도모하며 전달하고 싶은 말을 정확하게 적어내는 것이다. 이것들은 지름길이나 눈속임 없이 아주 천천히 정직하게 목표에 도달한다.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적을 수 없으며 연습이 부족한 부분에서는 건반 위의 손가락이 엇갈린다. 게다가 여기에는 자신의 색깔이 담긴다. 정답이 없다. 그래서 나는 몸이 만들어내는 작품들이 순수하다고 말하고 싶다. 거칠지만 오래 치면 부드러워지는 반죽처럼, 유연하게 다듬는 일을 계속해서 해내는 사람들이 순수하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오만함이 없는 이 행위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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