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그니까 뭐? 뭔 소리야. 키티 말고 케찹. 케찹 얘기 중이잖아 우리.
승재는 케첩이 야채로만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하는 중이었다. 나는 거기 동의했고 미주는…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
야 이제 집에 가자.
반대 주장을 펼칠 사람이 없으니 토론을 끝내야 했다. 키티 열쇠고리가 달린 미주의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미주를 일으켜 앉혔다. 화면엔 아직 58분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노래방 사장님이 계속 서비스를 넣어준 탓이었다. 다른 방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는 주제가 빠르게 전환되는 토론을 펼치고 있었다. 굳이 외래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부터 시작해서 외국 콘셉트를 잡는 가게들, 타투에 대한 의견, 아이를 낳을 건지 말 건지, 선호하는 아이돌 유무, 과일값 등등. 그러다가 케첩 이야기에서 토론이 끝났다.
승재, 집에 어떻게 갈 거야?
어떻게든 가겠지, 대답을 마친 승재는 곧바로 뒤를 돌더니 성큼성큼 멀어졌다. 그래, 넌 잘 가겠지. 나는 취한 미주를 우리 집에서 재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얜 항상 뭘 믿고 이렇게 술을 들이켜는 거야. 미주는 주로 대책 없었고 나는 거기 익숙했지만 가끔은 거리를 두고 싶었다.
기사님, 백조아파트로 가주세요.
네~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보기 드문 택시 기사님을 만났다. 미주가 깨어 있었다면 좋아했을 텐데. 미주는 공주 대접받는 걸 좋아했다. 귀족 가문의 철부지 막내딸 같은 느낌이었다. 승재가 있었다면 여기서 또 토론 시작이다. 너 막내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는 거 아니야? 하면서. 그럼 나는 이렇게 반박했을 것이다. 느낌이라는 게 있잖아. 이미지, 뉘앙스, 분위기. 그런 게 사회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요소라고. 아무튼 토론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때조차 한 번 결정한 것을 밀고 나갔다. 어떻게 하면 이 의견을 이기게 만들까, 하고. 솔직히 말하면 뭐든 자기 말이 맞는 것처럼 구는 승재가 얄미울 때도 있었다.
차가 멈추기 전에 미주를 깨워줘야 할 것 같아 저쪽 창을 향해 쓰러져 자는 미주를 살살 흔들었다. 미주야, 한미주. 미주는 투정을 부리듯 몸을 움직였다.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도망치고 싶은 것 같았다. 이제 진짜 일어나야 돼, 다 왔어.
백조아파트에 도착했습니다, 손님.
어플이 자동으로 결제해 줄 터였다. 차 문을 열고 미주를 억지로 일으켜 밖으로 끌어냈다.
감사합니다, 조심히 가세요~
네.
마음과는 달리 감사인사도 하지 않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얕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계단을 오르면서 층계참에 설치된 창으로 택시가 사라졌는지 확인했다. 이 아파트엔 엘리베이터가 없다. 백조아파트.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취업을 하면서 직장 근처로 구한 집이었다. 미주는 그때부터 쭉 우리 집에 들락거리고 있다. 중앙슈퍼는 편의점으로 바뀌었고 저기 있던 피시방은 아이스크림할인점으로 바뀌었다. 문구점은 무인 프린트 가게로 바뀌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미주랑 승재는 안 바뀐 것 같다. 이제는 10년도 길지. 그럼 나는? 한 직장에 뿌리박지 못하고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걸 보면 나 역시 그대로인 것 같다.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잘 타협할까? 나는 매번 타협할 지점을 못 찾고 흘러갔다. 주기적으로 집을 바꿔야 하는 소라게처럼. 집의 경우에는… 모아둔 돈이 없어서 이사를 못 간다.
자칭 공주님이라는 미주를 침대에 눕히고 바닥에 내가 잘 자리를 마련했다. 손님용 이불을 펼치고, 아니 손님이 왔을 때 내가 덮는 이불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승재와 마찬가지로 나도 사소한 것에 집착하는 편이다. 스탠드를 끄려고 소파 옆을 지나치는데 미주 가방에 걸린 키티 열쇠고리가 눈에 띄었다. 미주는 요즘 애들처럼 잘 꾸미는 것 같다. 다들 저런 걸 주렁주렁 달고 다니던데. 그나저나 요즘 애들이라니. 나이 먹으면서 가장 두려운 건 꼰대가 되는 거다. 미주는 어린애들이 쓰는 줄임말도 많이 안다. 얼마 전엔 무슨 케첩망상이라나? 그런 말을 했다. 그게 뭐야? 그때도 물어봤는데 미주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내 생각엔 감자튀김을 먹을 때 꼭 있어야만 하는 케첩처럼 꼭 필요한 망상이라는 뜻이었던 것 같다. 그때 승재가 제동을 걸었을 것이다. 야, 너네 케찹 없이 감튀 못 먹어? 아… 승재는 케첩을 케찹이라 발음했고 자동으로 재생되는 승재 목소리를 치웠다. 나는 케첩을 먹지 않는다.
낯선 것을 멀리하던 어린 시절엔 케첩 종류가 다양한 줄도 몰랐다. 방학을 맞이해 놀러 간 사촌오빠의 집에서 오뚜기케첩 말고도 다른 케첩이 있다는 걸 알았다. 오빠는 볶음밥 위에 케첩을 뿌렸고 나는 낯선 브랜드 케첩엔 손이 가지 않았다.
넌 안 뿌려? 이게 순수한 케첩이야.
민수 오빠는 먹기 싫다는 내게 장난치는 게 재미있었는지 내 밥에 케첩을 뿌릴 기회를 노렸다. 아 하지 말라고. 나는 밥그릇을 거의 숨긴 채 밥을 먹어야 했다. 밤늦도록 소화가 안 돼서 소화제를 먹고 잤는데 꿈에서도 케첩이 나왔다.
죽어, 죽어, 죽으라고.
누군가에게 살해를 당하는 장면이었다. 너무 무서웠는데 나는 아프지도 않고 죽지도 않았다. 나를 찌르던 사람이 떠나도 꿈에서 깨지 않고 정신이 멀쩡했다. 그리고 입가에 묻은 피에선 케첩 맛이 났다. 거기서 난 뭘 해야 했을까? 꿈속이란 걸 깨달았는데 깨지 못하고 꿈속을 계속 걸어 다녔다. 그 후로는 먹던 케첩도 먹지 못했다.
이부자리에 누우며 민수 오빠가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렸다. 순수한 케첩. 그게 뭐지? 나는 그 이면에 있는 것들을 생각해 본다. 순수하지 않은 케첩과 순수하지 않은 것들을. 다양한 재료가 섞인 것들. 이런저런 게 가미된 것들. 이쪽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더 많지 않나 싶다가도 광고 마케팅이나 누군가를 칭찬할 때 순수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걸 보면 둘 다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순수함이라는 단어를 의심해 볼 필요는 있다. 100% 순수한 건 드물 테니까. 어느 정도 순수한 걸 순수하다는 기준으로 잡아야 할지 잘 고려해봐야 한다.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건 좋지 않다. 그건 역시 세상과 타협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순수하다는 말이 남용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하며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