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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유나 Jul 04. 2024

먼 빗속에서

   줄곧 그 생각을 품어 왔기에 네 말을 믿었다.

   "괜찮아?"

   우산이 비를 막아주고 있었다. 정말로 아무렇지 않았다. 너는 우산을 쓸 줄 모르는 사람처럼 허둥거리며 걸었다. 너는 이내 모든 게 다 장난이었다고 털어놨지만 나는 내가 사생아라는 거짓말을 놓지 않았다. 내가 사생아일지도 모른다는 데 명확한 근거는 필요 없었다. 그 말을 듣기 위해 참아온 사람처럼, 마침내 가벼워졌다. 그러자 네 우산에 작은 구멍들이 뚫려 있는 게 눈에 보였다. 네 옷자락이 여기저기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수현아 네 우산, 비가 새는 것 같은데?"

제대로 된 우산이 아니라는 걸 네가 모를 리 없었다. 왜 그렇게 말했을까. 그 말을 꼭 해야 했을까. 하지만 뛰어가는 너를 뒤쫓진 않았다. 모든 것을 위협적으로 받아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대신, 펼쳐진 채 길 위를 뒹구는 네 우산을 집어 들었다. 쓰고 있던 우산을 목과 어깨 사이에 끼고 구멍 난 네 우산을 접었다. 네가 숨기고 싶어 하는 게 무엇인지 알았다. 한 손으로는 우산을 돌리고 한 손으로는 우산 깃을 차곡차곡 세우며 단추를 채웠다. 졸업식이었다.

-

   비가 계속됐다. 나는 초행길인데도 발길이 닿는 대로 걸었다. 유리 안에 속살이 다 드러난 어떤 고기가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그게 터키인지 치킨인지 돼지인지 아니면 다른 종인지 모른다. 쇠꼬치에 세로로 꽂혀 돌아가는 사체를 보며 모든 걸 까발리고 싶은 욕망이 솟았다. 하지만 뭘?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때 그 자리에 서서 수현을 기다렸으면 다시 만날 수 있었을까? 그런 건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려는 노력에 불과하다. 그와 나는 서로에게 무언가 기대할 만큼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 게다가 우리는 우연을 숭배했으니 같은 자리에 서서 기다린 나를, 혹은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온 수현을 서로 용납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인지 몇 번의 이사를 거치면서 수현의 구멍 난 우산을 버릴 수 없었다. 그것 때문에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는데. 나는 구멍 난 우산처럼 자리차지만 했다. 무언가 말하려 할 때마다 우산이 떠올랐고 입 밖으로 튀어나가려던 생각이 연쇄작용을 멈췄다. 그야말로 우산에 속박되었다. 지역의 지원을 받아 제값보다 저렴하게 심리상담소를 드나들 수 있었지만 아르바이트비의 대부분을 그곳에 쏟았다. 상담의사는 내가 지나치게 조심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함부로 말하지 않기 위해 지나치게 조심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적당히 북적이는 술집을 들어서며 나는 나를 용서했다. 아니 용서할 어떤 것도 없었다. '사생아'가 바로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나는 도구였다. 그것은 내가 잘못한 모든 것의 배경이 되어주었다. 내가 사생아라는 이유로 내 잘못을 덮어달라거나 용서해 달라고 부탁한 적은 없었다. 나 혼자만의 탈출구였다. 커다란 범죄를 저지를 만한 위인은 못 돼서 신고하기 애매한 잘못을 골라서 했다. 부모를 떠난 지는 오래되었고 고깃집 사탕바구니 들고 달아나기, 도서관의 책 모서리 접기, 주차장 한가운데 대여 자전거 여러 대 세워놓기, 친구의 애인과 섹스하기, 유부남 아저씨와 키스... 생각하고 보니 몇 가지는 신고당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른 연인들이라면 애인에게 자신의 행적을 자초지종 설명할 거라고 생각했다. 편견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런 방면에서 조금도 부끄럽지 않았다. 우산이 나를 망나니처럼 굴도록 몰아넣은 것이다. 생각하는 것에 지쳐버렸다. 망언하지 말자는 다짐이 제멋대로 행동하는 반작용을 낳았다. 나와 반대로 윤지는 대화에 굶주린 사람처럼 말이 많았다. 나와 있을 때를 제외하고 말이다. 언제나 그에게 용서받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내게 남은 양심이랄지 예의랄지 하는 것들은 작아지고 있구나, 걱정했다.

   친구인지 애인인지 가족인지 정의하기 어려운 이 관계가 편리하고 포근했다. 그래서 윤지에게 우리 관계를 물어보지 않았다. 그와는 때때로 함께 자고 자주 통화했으며 지금처럼 늘 그를 생각했다.


   몇몇은 나처럼 정처 없이 걷다 들어왔는지 세상에 재미난 게 없는 얼굴이다. 나는 이것저것 몇 잔 마신 뒤 그런 부류 중 누군가를 골라 얘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시끌벅적한 무리에 섞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지안은 아까부터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고 말했다. 내가 들어오기 전부터 있었으니 새로 들어오는 사람만 주목했던 나는 그의 말이 사실인지 가려낼 수 없었다. 게다가 그는 홀로 온 손님이 아니었다. 여럿이 모인 커다란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다가 그곳을 빠져나온 거였다. 지안은 혼자 앉아있었다면 힐끔힐끔 눈이 갈 정도로 서늘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분위기와 반대되는 따뜻한 웃음기를 띄며 내 쪽으로 걸어왔고 내 앞에 앉아 피나콜라다를 주문했다.

   지안의 술과 함께 바텐더는 불을 띄운 잔과 초록색 음료가 든 술잔을 들고 왔다. 피나콜라다는 지안 앞에, 나머지는 옆 테이블로 전해졌다. 스파이시한 향이 이쪽으로 넘어오고 있었다.

   "우와. 유진 씨도 저거 마실래요?"

   작은 얼음만 남아있는 내 잔을 보며 지안이 말했다. 그는 내 대답을 듣기 전에 같은 걸로 달라고 주문했다. 그를 말리지 않았다. 나는 아직 두 잔 째였다. 취하려면 멀었는데 이미 취한 지안을 챙겨야 할 것이 귀찮으면서도 흥미 있었다. 그는 남자친구와 시간을 갖는 중이라고 했다. 그 시간을 함께 망치고 싶었다.

   내가 술을 다 마시는 동안 지안은 아직도 술잔을 비우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새로 시켜준 술은 취향이 아니었다. 꽃모양 같기도 하고 별모양 같기도 한 팔각이 문제였다. 지안은 내가 남겨놓은 팔각을 티스푼으로 가져가 입에 넣었다.

   "그거 먹는 거예요?"

   "안 될 것도 없죠."

   지안은 조금 씹는 듯하더니 휴지를 가져가 입에 있는 걸 뱉어냈다. 그는 내 빈 잔을 보며 한 잔을 더 권했다.

   "기다리는 동안 이것도 좀 마셔 봐요. 마셔줘요."

   얼음이 거의 녹아 맛이 없을 게 뻔했다.

   "괜찮아요."

   지안이 내게 빨대를 들이밀었다. 안 그래도 코코넛향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조금만 마셨는데도 얼굴이 찌푸려졌다.

   "유진 씨는 다 괜찮대. 그냥 좀 알겠다고 하면 안 돼요? 싫으면 싫다, 좋으면 좋다."

   그동안 취한 지안이 하는 말에 맞장구를 쳤을 뿐 딱히 내 얘기는 하지 않았는데 들킨 기분이었다.

   "그러게요. 괜찮다는 말을 세상에서 없애버리고 싶어요."

   "그럼 이제 그 말 쓰지 마요."

   "그래요."

   어차피 술김에 하는 약속이었다.

   "취하면 뭐든 쉬우니까요."

   덧붙인 말에 지안이 웃었다.


   지안의 취한 걸음을 보니 윤지가 생각났다. 윤지는 앞으로 고꾸라질 듯 걸었다. 그냥 보면 모르는데 자세히 보면 그랬다. 골몰하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고 금방 어딘가로 돌진할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위협적인 동시에 아슬아슬한 걸음이었다. 그에겐 결함이 있었다. 뒷목의 뼈가 남들보다 하나 더 많게 태어났다. 겉으로 티가 나는 건 아니고 그가 말해주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비밀 같은 거였다.

   그날 윤지와 나는 서로의 비밀을 밤새도록 얘기했다. 윤지는 들어가기 싫다며 어리광을 부렸고 낯선 그 모습이 귀여웠다. 걷다가 공원이 나오면 벤치에 앉았다. 놀이터가 보이면 그네나 시소에 앉아 이야기를 계속했다. 일어서면 또 다음 쉴 곳이 나올 때까지 걸었다. 걸어도 걸어도 마땅한 장소가 나오지 않으면 도로 가에 걸터앉아 쉬었다.

   아침이 가까이 왔을 때 차도에서 터진 고양이를 발견했다. 윤지는 곧장 민원을 넣었으나 한참이 지나도 담당자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윤지는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을 뜨고 죽은 고양이 얼굴에 덮어줬다.

   "근무 시간이 아닌가 봐. 가자."

   윤지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어떤 사체들은 근무시간에만 정돈될 수 있다. 휴일엔 죽음 이후의 절차를 밟을 수 없단 거였다.

   "나도 작은 쓰레기가 되고 싶어. 근데 우리는 너무 큰 거 같아. 몸집도 크고 권리 같은 거... 난 그냥 죽으면 필요한 곳에 다 쓰인 다음에 버려지고 싶어."

   "나도 그거 알아. 그래도 살아있을 땐 잘 살아있자."

   윤지가 내 손을 잡아당기며 일으켰다.

   "응."

   윤지는 헤어지기 아쉬운데 피곤하다고 했다. 골목의 허름한 모텔을 찾아 들어갔다.

   잠에 들기 전 나는 윤지에게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게 있었다.

   "윤지야."

   "응?"

   "내가 예전에 사람을 죽였으면 어떡할 거야?"

   윤지는 웃었다.

   "왜, 너무 유치해?"

   "어떡하긴 뭘 어떡해. 지금 안 죽이면 되지."

   이번엔 내가 웃었다.

   "내가 지금도 나쁜 사람이면 어떡해."

   "어차피 넌 못 죽여."

   윤지는 웃음을 거둔 채 이어서 말했다.

   "왜냐면 넌 구원받고 싶어서 안달 난 사람 같거든. 못된 짓을 하고 다니는 게 네 비밀이라고 했지? 너는... 비겁한 방식으로 구원받고 있어. 누구도, 심지어는 너 자신도 스스로에게 어떤 기대도 못하게 만들려고. 사람들한테 맞거나 욕을 먹으면 죗값을 치렀다고 생각하겠지."

   윤지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윤지는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거겠지. 자고 일어났을 땐 아주 개운했다.

-

   "지안 씨는 비밀 없어요?"

   취한 나는 숙소로 돌아가겠다고 했는데 지안은 더 마시자며 나를 쫓아오고 있었다. 지안이 쫓아올 줄 알고 있었을까? 나는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비밀? 이미 다 말했는데. 유진 씨나 말해 봐요."

   숱한 잘못들 중 어느 것을 말해야 할지 고르고 있을 때 지안은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응. 싫어. 아니야. 아니야."

   그는 취한 입으로 몇 마디를 띄엄띄엄 말한 후 통화를 끝냈다. 이 시간을 견디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빨리 마무리 짓고 싶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가 떨어트린 휴대폰을 주워 전원을 껐다. 지안의 주머니에 휴대폰을 넣어주고 그를 부축해 내 짐이 놓인 방으로 함께 들어갔다.

   피곤했다. 씻고 나오자 지안이 식탁 앞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정말요? 정말 더 마시게요?"

   "아뇨, 그냥요. 그냥... 멍하니 있고 싶었어요."

   아까와 달리 이성적인 말투였다. 술이 좀 깬 것 같았다. 나는 지안에게도 어떤 거짓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마음대로 믿어버린 거짓처럼 그에게 맞는 거짓말을 찾아주고 싶었다.

   "지안 씨. 진심 아니었죠? 아까 저한테 키스한 거요."

   이게 그를 구원할까? 망쳐놓을까? 지안은 아무 말 없었다. 거짓말이라고 말하기 싫어졌다. 이건 사생아의 경우보다 가볍다. 나는 그의 반응을 살피며 이대로 자야 할지 더 하고 싶은 말이 남았는지 생각했다.

   "피곤할 텐데 씻고 푹 자요. 아무 때나 가고 싶을 때 조심해서 가고요. 되도록 날이 밝으면요."

   나머지는 그의 몫이었다. 나는 방으로 향했다. 이거면 충분하다. 충분히 즐겁고 적당히 피곤했다. 내가 겪은 일들을 전해주고 싶은 사람은 없지만 윤지가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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