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

by 푸르른

맞지 않는 신발을 신었다는 걸, 신발을 사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딱 보기에도 맞지 않는 사이즈라는 걸 알았지만, 그럼에도 한번은 신어보자고 생각했다. 얼추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던 순간도 분명 있었지만, 계속 걷다 보니 더 이상 이렇게는 못 걷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에 물집이 생기고 아려와도 정작 멈춰설 용기는 나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하루하루 마치 안개 낀 듯한 머릿속과 눈에서 생기가 사라진 채 공허한 눈빛만 남은 내 모습을 매일 밤 거울 속에서 마주할 때면 이렇게 계속 나아가는 게 맞는지 고민으로 머릿속이 가득했다. (나름 엄마가 어렸을 때 “너는 깨끗하고 초롱초롱한 눈빛이 제일 예쁘다”고 해주셨던 만큼, 커가면서 눈빛이 주는 힘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 것 같다.)


출퇴근길, 우연히 셔플로 재생해 둔 음악 앱에서 듣게 된 이찬혁의 ‘ERROR’ 앨범을 들은 이후로는 아침저녁으로 이 앨범만 반복 재생했던 것 같다. 지금 내 모습이 만족스럽지 않아서, 또 내가 흥미나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업무와 여러모로 감정적으로 힘들었던 이 일터에 다시 이끌려 가는 내 자신을 보고 있자니 ‘파노라마’의 가사에 감정이입이 됐다. (센티멘탈함이 극에 달해 괜히 영화 속 우울한 주인공에 빙의되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죽을 순 없어
버킷리스트 다 해봐야 해
짧은 인생 쥐뿔도 없는 게
스쳐 가네 파노라마처럼

내 인생은 이게 정말 전부인 걸까? 아직 해보지 못한 일도 많고, 마음속에 품고 있는 버킷리스트만 해도 한 움큼인데. (짧은 인생이라는데, 내가 벌써 서른에 다가갔다니... 정말 짧은 인생이잖아!!!)

‘파노라마’를 들을 때면 막연히 한 번쯤 해보고 싶었던 일들이 생각나면서 가슴이 뜨거워지다가도, 1분도 안 돼서 밀려오는 업무 연락에 금세 언제 그런 생각을 했냐는 듯, 내 머릿속 저편으로 튕겨져 나갔다.


신발을 벗고, 억지로 구겨져 있던 발을 꺼내 숨을 쉬게 해준다고 해도 쓰라림과 물집은 하루아침에 가시지 않았다. 답답하게 웅크리고 있던 발가락들에게 숨 쉴 시간을 주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당장 새로운 신발을 신고 전력질주로 다시 뛰어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이 날 지배했고, 한창 체력이 넘쳐 가장 전속력으로 달려야 할 나이라는데 이렇게 쉬는 게 맞는지 불안감에 압도당해, 무기력함과 자책감 속에 흐지부지 보낸 날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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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가 흐르고, 이제 퇴사 후 두 달이 조금 넘은 지금에야 나에게 정말 필요했던 건 '시간'이었다는 걸 느낀다. 한파가 몰아쳤던 겨울이 지나 벚꽃이 피는 봄이 찾아왔고, 꽁꽁 얼어붙었던 내 마음도 따스한 햇살에 조금씩 녹으며 이런저런 희망찬 생각들로 기지개를 켜는 중이다.


퇴사했을 때 한 회사 선배가 해준 말이 생각난다. “나중에 돌이켜보면, 이렇게 멈춰 선 걸 다행이라 생각하는 날이 올 거야.” 몇 달이 지난 지금, 그때 느꼈던 실망감과 좌절, 막막함이 조금씩 재정비하고 나아갈 수 있는 시간과 기회에 대한 감사함으로 바뀌며 그 말이 맞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방향으로 가고 싶은지도 모른 채 무작정 다시 뛰었다면, 훗날 뒤돌아보고 후회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오랫동안 선망했던 회사였기에 좀 더 머물렀다면 그 나름대로 많은 걸 배울 수도 있었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내 마음속 방향성과 맞지 않는 일을 하면서는 머릿속이 ‘what if’로 가득 차서 행복한 순간조차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을 거라는 거다.


벌써 두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살면서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취미들, 그리고 당장 커리어로 이어지진 않을 수 있어도 배워보고 싶은 다양한 분야에 시간을 들여 조금씩 배워보기를 시작했다. 내가 원하는 방향성이 무엇인지 되돌아보고, 나의 저변을 넓히고, 훗날 꺼내 쓸 수 있는 도구들을 하나씩 늘려가는 지금 이 시간이 단단함으로 이어진다면, 일보 멈춰 선 것 같았던 이 쉼이 훗날 더 멀리 나아가기 위한 길로 이보 전진이었음을 깨닫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시 나아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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