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녕 Apr 26. 2021

엄마의 미역국엔 다진 마늘이 없다.

어느 날, 친정에 갔다.


엄마가 끓여준 미역국의 깊고 진한 냄새가 집안에 풍겼다.


“엄마, 레시피가 뭐야.”

“뭐긴 뭐야. 미역, 소고기, 참기름, 국간장 넣고 끓이는 거지.”


너무 단출했다. 근데 생각해보니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다진 마늘이 없다는 것! 아니! 모든 요리책에 등장하는 다진 마늘이 없다니! 믿을 수 없었다. 마치 선생님의 정답이 틀린 것을 찾아내 기쁜 학생이 된 마냥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미역국엔 다진 마늘을 넣어야지!”


그러자 엄마 왈,


“안 넣어도 돼. 이것 봐 이렇게 잘 먹잖니?”


엄마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딸은 외할머니의 미역국으로 밥 두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그랬다. 다진 마늘을 안 넣은 엄마의 미역국은 정석대로(?) 끓인 내 미역국보다 훨씬 맛있었다. 함께 간 남편도 “장모님 미역국 좀 싸주시면 안 돼요?”라고 할 만큼. 집으로 돌아가는 길, 문득 생각이 들었다.


사람마다 저마다의 레시피가 있다는 것을. 보편적으로 알려진 레시피는 ‘방향성’ 일뿐이지 정답이 아니라는 것을. 세상의 모든 엄마들에게는 각자의 ‘손맛’이 있다는 것을. 조금 오버해서 기존의 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선 육아와 요리가 무척 닮았다는 것을. 육아라는 ‘요리’에는 레시피가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육아는 살아있는 사람을 키우는 것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매 순간 바뀐다는 것. 강아지도, 고양이도, 하물며 아주 작은 지렁이도 저마다의 속도에 맞게 살아가지 않는가. 그런 존재에게 ‘패턴’을 정해준다는 것이 얼마나 아찔한(?) 발상인가, 하는 생각이 들자 그동안 내가 해 온 육아가 소름 끼치게 무서워졌다. 깨어나는 시간도, 먹는 시간도, 노는 시간도 모두 다를 아이를, 가장 자연스럽게 본능대로 움직이는 아이에게 가장 부자연스러운 일정을 정해놓고 그대로 움직이게 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지난 세월의 나는 꽤나 어리석었다. 아기가 태어난 후엔 유명 SNS나, 블로그, 육아책을 보며 육아의 방향을 잡았으니 아이에겐 늘 ‘가장 모범적인’ 모습을 원했던 셈.


그러다 보니 많이 아팠다. 기준이 높은데 따라오지 않는 아이 때문에 힘들었다. 강박적인 성격. 융통성 없음. 정답대로 하며 만족해하는 성격 때문에 매 달 위경련에 시달리고 구토를 했다. 한 번은 도저히 혼자서는 견딜 수 없어 친정에 몇 주 머무른 적이 있다.


엄마, 나 너무 아파,라고 말하자 엄마는 괜찮다고 해주었다. 엄마, 딸이 아침을 잘 먹지 않아, 떡뻥만 먹으려고 해,라고 말하자 저 좋은 거 하나라도 잘 먹으면 되는 거라고, 해주었으며 맨날 계란찜만 먹으려고 해, 어쩌지?라고 하자 그럼 계란으로 맛있게 요리를 해주면 되지,라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 한 마디.


“사람이니까 그래, 사람.”


우문현답.


“그래도 된다. 그래도 돼. 이따가 먹여도 돼. 늦게 자도 돼. 정해진 게 어딨니. 애 키우는데. 그냥 편하게 해. 편하게.”


곱씹을수록 눈물이 나는 말이었다.


그래도 돼, 안 해도 돼, 빼도 돼, 정답이 어딨니. 애 키우는데.


육아에 힘들 때마다 육아 전문가들의 책을 사서 읽으며 나를 자책했다. 오늘은 더 놀아줬어야 했는데 못했어, 이 재료는 다른 아기들이 잘 먹는다는데 안 먹어, 이유식을 시작하려면 이런저런 준비가 완벽해야 하는데 난 그렇게까지는 못했네, 집에서 애만 보면서 이유식을 사 먹이 다니 난 너무 바보 같아, 저 사람들은 저렇게 잘하는데 나는 왜 이렇게 못하지. 얘는 왜 정해진 대로 안 따라오지? 따위의 자책은 화수분처럼 할수록 할수록 넘쳐흘렀다. 스스로를 자책할수록 나만 힘들어질 뿐이라는 걸, 곁에서 지켜보는 남편의 피가 바싹 마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멈추지 못했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육아책’의 ‘(이 시기엔) 그래야 한다.’가 절대적이었으니까.


하지만 내게 정작 필요한 것은 완벽한 정보가 정리된 육아 베스트셀러가 아니라, 살아가며 경험이 쌓인 누군가의 ‘한 마디’였던 것이다.


괜찮아. 엄마가 그렇게 했는데도 너랑 언니가 이렇게 잘 컸지 않니?라는 말 한마디가.


그 말 한마디가 마음을 풀어주었다. 책과는 아주 벗어난 육아를 해도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 엄마가 날 키울 땐 이런 육아 정보 없었지만, 나 행복했잖아. 내가 행복하면 울 딸도 행복할 거야. 편하게, 편하게 하자.라고 생각하니 위경련이 줄어들었다. 대신, 잡생각 대신 아이와 좀 더 놀아주기로 했다. 머리를 비우니 노는 것도 조금은 즐거웠다. 미역국에 넣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다진 마늘을 빼도 충분히 맛있는 미역국이 나오는 것처럼, 육아도 도리어 뭔가 해야 한다는 생각을 빼고 나니, 편해졌다. 인생의 아이러니, 역설.




지금 이 순간도 분명 나와 비슷하게 아이를 키우고 있는 엄마가 있을 것이다. 정해진 대로, 검색한 대로. 그는, 혹은 그녀는 뜻대로 되지 않는 육아에 스트레스받고 있을지도 모른다. 육아에 대한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 오히려 수많은 정보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며 이 순간에도 시행착오를 겪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걸 알면서도 멈출 수 없어 스스로를 옥죄이는 상황 속에서 힘들어하고 있을지도.


나 역시 물론 아직도 다양한 상황이 생길 때마다 책을 뒤적이고 인터넷을 검색한다. 하지만 예전보다는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검색 대신, 아이를 살피고 그 안에서 남편과 함께 상의하며 해결해보려고 한다. 정답은 없다. 알 수 없는 인생에 아이의 삶이라고 정해진 게 있을 수 없다.


육아책의 정보는 정제된 이야기일 뿐, 실상 그렇게 완벽하게 살고 있는 아이는 없을 것이다. 실패보단 성공의 이야기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책 속에서도 수많은 실패 끝에 성공한 일부를 담았을 것이라고 믿는다. SNS에 절망을 담지 않듯이. 사람들이 보고 싶은 것은 실패보단 성공이고, 절망보단 희망이니 당연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 잘하고 있고 괜찮다. 아이는 밤을 새워 놀지 않는 이상 언젠간 잠들 것이고, 몸에 좋다는 브로콜리를 죽도록 싫어해도 괜찮다. 고구마가 달달하고 맛있지만 내 아들은 안 먹을 수 있고, 그 좋다는 문화센터도 아기가 낯을 많이 가리면 안 가도 된다. 그 돈으로 다른 재밌는 장난감을 사서 같이 놀아주면 된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에게, 지금도 밤잠을 이루지 못하며 잠든 아기 옆에서 폰을 검색하는 그대들에게 말한다(고 적으며 사실 내가 스스로 되뇐다.)


미역국엔, 다진 마늘이 없어도 된다. 그래도 맛있다.


작가의 이전글 삼양라면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