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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Jul 20. 2021

된장 독립 선언

스승님께 인정받았으니 이제 하산.. 해도 될까요?


  새댁의 마음가짐이야 언제나 똑같다. 이왕이면 맛있는 음식을 짜잔 하고 내놓고 싶은 마음. 그래서 남편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

 

  나 역시 같았다. 새댁의 푸릇푸릇한 마음으로 메뉴를 생각했다. 뭐가 좋을까, 어떤 게 맛있을까. 문득 어린 시절 즐겨 먹던, 자취할 때 종종 끓여 먹던, 엄마의 된장찌개를 흉내 내보기로 했다. 칼칼하면서도 구수한, 두부와 호박과 감자가 어우러진 그것이라면 새신랑의 인정을 받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두부, 호박, 양파, 표고버섯 그리고 감자까지 듬뿍 넣은, 심지어 갓 결혼한 막내딸을 위해 바리바리 싸준 집된장(맛의 시판 된장)에 칼칼함을 추가할 청양고추까지 넣었으니 맛이 없을 수 없었다. 완벽한, 엄마의 레시피였으니까. 물론 물 양 조절을 실패해 약간 국물이 많기는 했지만, 된장을 덜 넣어 국물이 멀겋게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요리 내공 40년 차의 엄마가 알려준 것이니 당연히 맛있겠지 싶었다. 식탁에 찌개를 올렸다. 부글부글부글 소리가 주는 맛이 더해져 기대감은 한껏 더해졌다.


  한 입 떠 국물을 맛보던 남편은 아무 말 없이 다른 반찬으로 손을 향했다. 맛이 없다는 액션인 줄도 모른 나는 '맛있지?', '내가 된장찌개 하나는 잘 끓인다'며 온 갖가지 생색을 다 내며 그날의 저녁을 마무리했다. 냄비에 잔뜩 남아있던 된장찌개를 외면한 채.


  요리를 잘 못하지만, 또 싫어하지만 나에겐 막연한 이상향 같은 존재가 있었다. 바로 엄마였다. 엄마는 부지런하고 성실했으며 요리 솜씨까지 좋았다. 웬만한 반찬은 뚝딱 해 냈고, 때마다 그때에 맞는 음식을 직접 만들어 주었다. 가령 동짓날 팥죽, 정월대보름엔 오곡밥과 각종 나물, 손만두에 각양각색의 김치까지. 심지어 어떤 날엔 딸기를 잔뜩 사다가 딸기잼을 해 준 적도 있었다. 딱 하나 엄마가 약했던 소위 말하는 샐러드 류의 서양 음식도 사위를 둘이나 맞이하면서 배우기 시작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이런 걸 먹는다며?'라며 양상추, 적채, 그리고 토마토까지 얹은 샐러드에 드레싱을 뿌려두곤 했다. 네 형부가 이걸 좋아하더라, 네 남편이 이걸 잘 먹더라면서. (정작 엄마는 마요네즈에 설탕을 넣어 버무린 사라다를 좋아하면서)


  무튼 그런 엄마니까, 그랬던 엄마였으니까 엄마의 레시피는 절대적이었다. 소위 말하는 '요 똥', '요린이', '요알못'인 나도 어깨너머로 조금씩 배웠던 것들이 있었으니 신혼살림을 시작한 나에게 엄마의 레시피는 어떨 땐 '요리책의 그것'보다도 믿음직한 거였다. 그런데, 엄마가 알려준 대로 끓인 된장찌개는 자꾸 맛이 어긋났다.


  자신감이 떨어졌다. 아무래도 요리는 내 체질이 아닌가 싶었다. 그러다 보니 요리를 더 하기 싫었다. 2인 가구는 사 먹는 것보다 시켜 먹는 게 훨씬 득이라며 스스로를 설득했고 배달앱을 켜며 각종 음식을 배달해 먹었다. 감자탕, 찌개, 피자, 치킨, 햄버거, 김밥, 라면. 그 시절 가장 많이 먹었던 음식들이다. 가끔 집밥이 먹고 싶으면 엄마 찬스를 썼다. 엄마는 당신이 해올 수 있는 가장 많은 양의 밑반찬을 해다 주었고 나는 그 반찬을 먹으며 남편에게 말했다. "진짜 울 엄마 반찬 맛있지?" 남편은 바리바리 싸오시는 장모님께 죄송해했지만 둘의 실력보다 월등히 맛 좋은 음식을 거부할 자신은 없어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짜장면과 짬뽕, 탕수육을 한 껏 시켜먹은 다음날이었던가. 속이 느끼하고 더부룩했다. 가스활명수를 두 병이나 먹었지만 소용없었다. 갓 지은 따끈한 쌀밥에 구수한 된장찌개를 한 술 떠먹고 싶었다. 냉장고를 뒤적여 보니 재료가 얼추 있었다. 두부, 호박, 그리고 된장. 단출한 재료였지만 맛은 낼 수 있겠다 싶었다. 때 마침 있던 뚝배기에 맹물을 적당히 붓고는 된장 한 스푼 넣어 휘휘 젓고 불을 켰다. 두부는 반 모만 썰어 두고, 애호박은 반달 썰기 해두었다. 물이 끓기 시작할 때 재료를 한꺼번에 다 때려 넣었다. 부글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소리를 들으니 침이 고였다. 얼른 익어서 나의 느끼한 속을 달래주렴. 얼른 익어라. 얼른!


  밥, 찌개, 그리고 김치와 김을 가져다 놓은 밥상은 소박했다. 남편을 불렀다.


- 밥 다 됐어. 얼른 와.

- 힘든데 뭐 하러 찌개까지 했어.


  라며 날 위로한 남편은 된장찌개를 보더니 흠칫 놀랐다. 그 옛날 먹었던 충격의 찌개가 생각났던 모양이다. 먹고 싶지는 않았겠으나, 정성을 생각해서 한 술 떠먹던 남편은 '아!'라며 얕은 탄성을 뱉어 냈다. 그리곤 맛있다며 연신 숟갈로 찌개를 떠먹었다. 속도로 보아 진심이었다. 맛있다, 맛있다... 결혼 후 처음 마음으로 와닿았던 호평이었다. 남편은 그날 밥을 두 공기나 먹어 치웠다.


  그날의 찌개는 참 맛있었다. 솔직히 엄마의 맛이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구수했고, 진했다. '급하게 만들면 잘 되는 건가? 재료가 없으면 맛있게 끓여지나?'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다 넣은 재료를 곱씹어 보았다. 된장, 두부, 호박... 그랬다. 더한 건 없었지만 빠진 건 분명했다. 양파와 감자. 그들이 빠지니 오히려 맛이 더 좋았다. 양파는 익을수록 단 맛이 강해져 맛을 해쳤고, 감자는 휘휘 적을 때마다 으깨져 국물을 탁하게 만들었다. 모두 남편이 싫어하는 맛이었다. 사실 남편이 흘리듯 말한 적이 있었다. '나는 찌개에 양파 넣는 건 달아서 싫더라.', '난 감자를 좋아하지 않아'라고.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이 빠지니 우리가 좋아하는 맛이 되었다. 엄마와 함께 살던 시절의 맛을 그리다 보니 정작 함께 살고 있는 남편의 취향은 넣지 못했다. 음식이란 건 과거의 맛이기도 하지만, 함께 살고 있는 사람, 혹은 대접할 사람의 취향도 들어가야 한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그래서 집집마다 된장찌개의 레시피가 다르며, 세상에 존재하는 엄마만큼 손맛도 다 다르다는 말도 나오는 것이란 것을 그때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그날은 절대적인 엄마의 레시피가 깨지는 순간이자 (된장찌개만큼은) 내 레시피가 확고해진 순간이었다. 더불어 함께 살아갈 남편의 취향이 내 레시피에 업데이트된 순간이기도 하고.


  물은 500ml면 적당하다. 넘치면 싱겁고 부족하면 짜다. 두부는 반모를 깍둑썰기 한다. 한 모를 다 넣으면 실패할 확률이 높다. 남편이 좋아하는 팽이버섯은 밑동을 따서 갈기갈기 찢어 놓아야 하지만 나는 뭉텅이로 있는 팽이버섯을 좋아하므로 적당히 찢는다. (가끔 비싼 표고버섯을 넣기도 하지만 난 향이 강해 가능하면 뺀다. 있어도 안 넣는 줄은 남편은 모른다) 애호박은 초록빛이 고른 것을 골라 반만 잘라 반달 썰기를 한다. 썰기의 규칙은 없다. 그냥 맘에 드는 대로 반달 썰기를 하든, 아니면 부채꼴 썰기를 하든 내키는 대로 한다. 된장과 재료가 얼추 조화롭게 끓고 있을 때 다진 마늘을 반 큰 술만 넣는다. 한 큰 술을 다 넣으니 마늘향이 강해 (된장) 마늘 찌개가 되었다. 청양고추가 있으면 넣되, 없으면 뺀다. 혹시 4살짜리 딸내미가 구수한 냄새에 침을 흘리며 탐을 할 수 있으니 가능하면 고춧가루도 빼는 게 좋다. 된장은 지금 먹고 있는 찌개용 된장이 가장 내 입에 맞는다. 엄마가 준 된장도 좋지만, 지금 우리의 입맛은 이 된장이다. 부글부글 소리가 깊어지면 약불로 줄여 대충 10분 정도 끓인다.


  그 후 꾸준히 된장을 기본으로 다양한 국과 찌개를 도전했다. 그러다 보니 이젠 된장요리만큼은 적당히 할 줄 안다. 된장찌개로 잃었던 자신감을 된장찌개로 찾은 꼴.




 작년 가을 엄마가 오셨을 때 항상 짜장면만 대접한 게 속상해 남편과 함께 한상차림을 준비했다. 전통 한식 바인 엄마, 아빠를 위해 된장찌개, 오징어볶음, 불고기, 꽈리고추무침, 깻잎 장아찌 등 다양한 음식을 차렸다. '힘든데 뭘 이런 걸 차렸냐'면서도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진 밥상을 보며 반색하던 엄마는 된장찌개를 한 입 뜨더니 말했다.


- 야. 이거 내가 한 것보다 맛있네.


입맛이 꽤나 까다로운 아빠도 말없이 드셨다. 오랜 경험 상, 말이 없다는 것은 맛이 있다는 것.




오래도록 우러러본 내공 40년의 스승님께 인정을 받았다.

그렇다면 조금은 섣부른 독립을 선언한다.


(아직은) 된장 독립 선언!


해도 될까요? 스승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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