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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Jul 27. 2021

아주 사소하면서도 풍요로운

나의 외간장밥 이야기

  입맛이 없다.

  요 며칠 두통 때문에 아무런 의욕도 없고 하기가 싫었다. 만약 지금 혼자 살거나, 신혼이었다면 살림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텐데 아이가 있어 그마저도 할 수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선택할 수 없는 삶도 있다는 것을, 엄마가 되고서 알았다. 그저 침대에만 누워있고 싶은데 아이가 나를 부를 때, 얼른 밤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아직 오후 3시 밖에 안 되어 아이가 놀자며 내 바짓가랑이를 잡을 때 문득, '딩크'가 옳지 않았나 싶다가도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좋다는 아이의 애교에 생각을 지운다. 그래, 아픈 건 내 탓이지 네 탓이 아니니까.


  무튼 두통이 오면, 소화불량까지 와서 먹는 족족 얹히는데 그 때문에 제대로 먹질 않았더니 체중이 2kg이나 빠져있다. 젊었을 때야 날씬해졌다며 좋아했지만 지금은 괜히 걱정이 앞선다. 며칠 안 먹었다고 이렇게 빠지는 게 맞나? 지금 건강이 괜찮은 것 맞나? 갖가지 걱정과 불안은 다시 두통을 부르고, 그 두통은 다시 소화불량을 부른다. 악순환이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두통은 시시 때때로 찾아와 나를 멈춰 세운다. 무리하지 마, 오버하지 마, 지금은 잠시 쉬라고 했잖아, 멈추지 않으면 더 힘들게 될 거야, 라며 나를 붙잡는다. 그 말을 듣지 않으면 보란 듯이 복수라도 하듯 며칠을 끔찍하게 아프다.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고 눈도 뜰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운 순간들이 일주일 남짓 지나가면 겨우, 사람처럼 살 수가 있게 된다. 그래서 요새는 그 말을 아주 잘 들으려고 노력한다. 오늘도 어제까지는 정말 끔찍하게 아프다가 이제는 조금 나아져서, 다시 아이패드 앞에 앉았다.




  이렇게 입맛도 없고, 아무것도 차려 먹기 싫은데 뭐라도 먹어야 할 때, 그 좋아하는 컵라면의 물도 올리기 귀찮을 때, 나에게 별미처럼 먹던 음식이 있다.


  짭짤하고, 고소한 향기를 맡으면 없던 내 입맛도 절로 돌아오게 하는 음식, 어릴 적 편식이 심하고 입도 짧았던 나를 움직였던 엄마의 마지막 보루 같은 음식, 그것은 바로 '외간장밥'이었다.


  갓 지어 고슬고슬한 밥에 간장을 두어 숟갈, 참기름 한 바퀴를 스윽 두른다. 마지막으로 참깨를 톡톡톡 뿌리곤 숟가락으로 쓱싹쓱싹 비벼주면 끝. 요새 사람들이 넣는 계란은 넣지 않는다. 오롯이 간장과 참기름, 그리고 참깨의 맛과 흰 밥의 단 맛으로만 이루어진 외간장밥은 이상하게도 군침이 도는 음식이었다. 요리랄 것도 없는 그것 한 그릇이면, 절로 입맛이 돌아 엄마가 꺼내 준 반찬도 두어 가지 집어 먹곤 했다. 나를 살찌우게 했던 외간장밥.


  그러고 보니 외간장밥은 참 끈질기게도 내 옆에 있었더랬다. 자취하고 끼니를 챙겨 먹어야 할 때, 밥, 간장, 참기름이면 뚝딱 해칠 수 있어 자주 해먹기도 했고, 한 번은 아기 낳고 너무 배가 고픈데 내 품에서 잠든 아기를 깨울 수 없어 조심조심 밥을 데워 외간장밥을 만들어 먹기도 했던 것. 당시 그런 나를 보며 남편은 뜨악, 하고 놀라며 물었다.


  "그게 뭐야, 맛이 있어?"


  한 번 먹어보라고, 생각보다 괜찮다고 한 숟갈 권하는 내 손을 남편은 정중하게 거절했다. 음식은 맛보다도 추억의 영역인지 도통 내키지가 않는 모양이었다. 하긴 남편에겐 외간장밥만이 있을 뿐, 그 옛날 90년대 어느 즈음에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는 오후, 젊은 엄마와 어린 내가 어우러진 풍경은 보이지 않으니까, 밥 먹기 싫다고 투정 부리는 내게 어떻게든 밥을 먹이려는 엄마의 마음과, 생각보다 맛이 좋아한 그릇을 더 먹고 싶어 한 내 마음은 느낄 수 없으니까, 그럴 만도 하다.


  그 후, 남편은 나의 외간장밥을 보며 '계란'이라도 넣어 먹으라고 조언해 주었지만, 난 나만의 오리지널이 있는 거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남편의 말이 맞다. 간장, 참기름, 깨, 그리고 흰 밥만 들어간 나의 외간장밥은 영양학적으론 전혀 득이 되지 않는다. 지나친 나트륨 섭취, 그리고 탄수화물이 전부라 균형이 깨진 식단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간장밥을 먹으면, 그 부실하고 보잘것없는 밥을 한 숟갈 넘기면 괜히 마음이 편안해지고, 소화도 잘 되는 것 같다. 이어 한 숟갈을 더 먹으면 혼자서 그 옛날로 돌아가는 기분이 든다. 엄마, 배고파,라고 말하면 간장에 밥 좀 비벼줄까?라고 대답하는 나의 엄마가 있던 그때로. 마지막 한 숟갈을 먹고 그릇을 싹 비우면, 잘 먹었어?라며 좋아하던 엄마의 표정이 떠오르는 것만 같다.


  그러니까 외간장밥은 멀리 있는 엄마와 나를 연결 짓는, 아주 사소하고 간단하지만 풍요로운 음식인 게다. 그래서 숱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다른 것은 다 잊어도 이 녀석만큼은 잊지 못한 것이겠지. 엄마로부터 독립했을 때, 텅 빈 마음을 채워 준 것이겠지.


  그렇다면, 나는 우리 딸에게 어떤 추억이 담긴 음식을 주고 있나 돌이켜보니, 별반 특별할 게 없다.

  요리는 관심에도 없고, 맛도 잘 낼 줄 모르는 엉성한 엄마가 주는 음식이라 내 보기에 기억에 남을 음식이 없어 보인다.

  그러면, 우리 딸이 언젠가 나를 떠나 새로운 세상에 홀로 던져졌을 때, 음식으로 나를 그리지는 못할 것 아닌가.

  간장 한 스푼, 참기름 한 바퀴, 참깨 톡톡, 정도의 간단한 방법으로 나를 그릴 수 있다면 녀석의 마음도 나처럼 풍요로워질 텐데.

  멀리 있어도 같이 있는 듯이 행복해질 텐데.


  안 되겠다. 외할머니에게 받은 마음을 담아 네게도 마음을 채우는 음식을 주겠다. 앞으로, 하나씩 우리 같이 살아가며 찾아보겠다.

  일단, 외간장밥 한 그릇부터 먹고.



** 원래 외간장밥이 아닌 왜간장밥이 맞다고 합니다. 조선간장의 반대인 '왜간장'이 들어간 밥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어릴 적부터 써오던 '외간장밥'이라는 표현이 훨씬 와 닿아 이 글에선 '외간장밥'으로 표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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