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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Jun 03. 2021

엄마의 치킨 배달부가 되었던 날

이토록 사소한 것에 행복해질 수 있다면

  "네 아빠가 치킨 먹는 사람이니? 너 온 김에 한 마리 시켜 먹을래?"


  아주 오랜만에 본가에 갔던 날, 저녁 즈음 엄마는 나에게 말했다. 오랜만에 치킨이 당긴다고. 요새는 어디가 맛있냐고. 돈은 줄 테니 주문은 좀 네가 하라고.


  우리 가족은 뼛속부터 한식 파였다. 스테이크보다는 갈비찜을, 족발보다는 집에서 해 먹는 수육을, 당연히 치킨보다는 닭볶음탕이나 닭백숙을 좋아했다. 그러니 샐러드보다 각종 나물이 넘쳐났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엄마의 뛰어난 요리 솜씨 덕분에 시켜먹는 음식보다는 엄마표 요리가 맛이 있기도 했고, 또 뭔가가 먹고 싶다고 말하면 모든 걸 뚝딱 만들어내는 엄마의 '실력' 때문에 뭔가를 배달해 먹을 일이 거의 없었다. 어릴 적엔 아주 가끔 퇴근길에 아빠가 사 온 통닭(종이 가방에 들어있는)을 먹곤 했지만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랬던 엄마가, 먼저 '치킨'이 먹고 싶다고 하다니. 의외의 일이었다. 마침 나도 출출했기에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배달앱 대신, 냉장고 측면에 붙어있는 치킨집 전화번호를 눌렀다. 디리리링 신호 가는 소리가 괜히 정겨웠다. 터치 한 번에 주문이 끝나 버리는 게 아니라, 사장님의 목소리를 들으며 주문을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모두가 했지만, 지금은 잘하지 않는.


  "여보세요. 00 치킨입니다."

  "아! 네. 여기 00 동인 데요. 후라이드 치킨 배달해주세요. 양념도 많이 주시고요."

 

  주문을 하고 tv를 보며 아이들이 놀고 있는 걸 보고 있는데 엄마가 시켰냐며 묻는다. 곧 올 거라고 말을 하자마자, 치킨이 도착했고 우리는 바쁘게 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둥그런 개다리소반에, 포크, 그리고 소금을 담을 종지 하나면 끝. 놀던 아이들도 기름진 냄새가 풍기자 스멀스멀 밥상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종이 상자를 열자마자 보이는 치킨의 영롱한 자태에 감탄하고 있는데, 엄마가 신이 난 어린아이처럼 한 조각 집어 먹기 시작했다. 세상 가장 행복한 표정으로. 마치 처음 사탕을 먹은 4살 배기 우리 딸처럼.


 "아, 맛있다!"


  배가 고프면 찬 밥에 오이지, 고추장, 참기름을 넣고 쓱쓱 비벼 먹던 엄마였다. 내가 참치김밥에 라볶이를 사다 먹으면 '그게 맛있냐'며 마요네즈가 묻은 김밥은 입에도 대지 않던, 엄마였다. 그런데 내 앞에 앉은 엄마가 '치킨'을 '신나서' 먹고 있다. '맛있다', '오랜만에 참 좋다'는 말을 연발하는 엄마는 참, 오래간만에 즐거워 보였다.


  그날, 엄마가 먹은 치킨은 겨우  조각 남짓. 엄마는 갑자기 속이 느끼하다면서 콜라를 벌컥벌컥 마셨고, 밥과 김치를 가져와 그날의 저녁을 마무리했다. 웃음이 났다. 고작  조각을 먹기 위해 그렇게 치킨, 치킨, 노래를 불렀던 것일까. 주문 후에는 언제 오냐며 애타게 기다렸던 것일까. 엄마, 그럴 거면  시켰어?라고 따지듯 놀릴까 하다 그만두었다. 누구나 그럴 때가 있으니까. 무엇보다 엄마가 그토록 행복해 보인  처음이었으니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아주 '지극히' 사소한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사소한 포인트 하나에 행복해지기도 하고, 불행해지기도 하며, 슬퍼지기도 하고, 즐거워지기도 한다.


  우리 엄마에게는 그날  순간, 오랜만에  딸과 치킨을 먹는 일이 행복을 주었던 .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게다. 어떤 사람은 오랜만에 보고 싶은 친구를 만나서, 다른 사람은 예상치 못했던 기프티콘에 행복해진다. 무채색이었던 일상이 알록달록 해지는 것은, 아주 사소한 일에서부터 시작되는 .


  이렇게 사소한 것에서 행복할 수 있다면 평소에 양껏 행복해질 수 있는 것 아닌가 싶다. 지금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내가 하고 싶은, 나를 즐겁게 해 줄 것을 생각하고, 실천한다면 어떨까.



  커피를 먹고 싶으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테이크 아웃해서 한 잔 먹는 것.

  오늘은 영화 한 편을 보고 싶다면, 왓챠나 넷플릭스에서 괜찮은 한 편을 골라 끝까지 보는 것.

  10년 만에 앨범을 낸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들으며 흥얼거리는 것.

  욕조에 물을 한 껏 받아 반신욕을 하며 하루의 독을 비워내는 것.



 지극히 사소한 일상을 선택할 수 있을 때, 그래서 하루의 순간을 소소한 행복으로 채울 수 있을 때, 그때 삶이 온전한 내 것이 되고, 행복해진다고 생각한다. 그런 하루가 쌓이다 보면 '나'라는 사람에 대한 매뉴얼이 생길 것이다. 나를 즐겁게 만드는,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행복한 상태가 되는, '나 사용설명서'가. 그러면, 그 자체로 또 나는 행복해지겠지.


  그러니까 대단한 것을 좇지 않고 지금 내 주변을, 나를 돌아봐야겠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싶은가. 내가 지금 가장 행복해질 수 있는 소소한 방법은 무엇인가.

  나는 지금 아이스커피가 먹고 싶다. 달달한 시럽을 넣은 바닐라 라테라면 더욱 좋다. 출근을 하자마자, 커피를 먹겠다. 그리고 한 번 더 행복해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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