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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Jul 22. 2021

시리얼은 죄가 없다.

  나는 시리얼을 좋아하지 않는다. 과자 같이 생긴 게 비싸기만 하고, 꼭 우유가 있어야만 먹을 수 있는 데다가(나는 우유를 먹으면 배탈이 나는 사람이다) 먹고 나면 이상하게 배부르면서 배고픔과 동시에 결정적으로 입 안에 가득 남는 이물감이 싫다.


  신혼 시절, 마트에서 시리얼을 두 봉지나 집어 카트에 넣던 남편은 내게 말했다.


  "우리 둘 다 일을 하니까, 아침엔 이걸로 간단히 먹자."


  알았다고 대답했지만 내 몫의 시리얼은 유통기한이 한 참 지나고서도 반 이상 남아 있었다. '넌 왜 안 먹냐'는 남편의 질문에 '난 시리얼이 싫다'고만 답했을 뿐 사실 그 이유를 잘 설명할 수 없었다. 심지어 임신 중인 나를 위해 사다 준, 아주 좋은 시리얼도 먹지 않고 버렸으니 이쯤되면 나에겐 시리얼에 대한 근거 없는 '거부감'이 있다고 봐야할 것 같다.



 

  사실 어린 시절의 난, 시리얼을 아주 좋아하던 아이였다.


  어릴 적 엄마랑 20분 정도 걸어가면 지하에 아주 큰 슈퍼마켓이 있었다. 동네 슈퍼엔 없는 다양한 식자재가 있던 그곳에서 단연 눈에 띄었던 것은 호랑이 기운이 솟아나는 캘로그 콘푸로스트. 워낙 비싸 엄마를 졸라 몇 번이고 사와 먹었던 기억이 난다. 설탕이 잔뜩 묻혀 있는 시리얼에 우유를 부어 먹고 난 후, 달달한 우유 국물을 원샷하는 게 너무 좋았다. 어린 내가 반할 만한 그 아찔한 단맛은 지겨운 집밥에 한 줄기 빛 같은 존재였던 셈.


  그 시절의 나에게 시리얼은 밥이 아니었다. 밥을 먹고 먹는, 출출할 때 먹는 일종의 간식이었다. 엄마가 차려준 밥상에서 얻지 못한, 자극적인 단맛과 고소한 맛은 입이 짧던 나를 움직이게 했다. 한 번 먹으면 국그릇에 가득 말아 두 번을 먹었으니 이만하면 그 시절 시리얼이 내게 주는 기쁨은 꽤나 컸음에 분명하다. 그런 시리얼'이 싫어진 것은 아마도 자취할 때부터였던 것 같다.


  타지에서의 직장생활을 시작한 그때, 모든 것이 처음이었던 나를 걱정한 엄마는 신신당부했다.


 '아침은 꼭 챙겨 먹어. 밥이 안되면 그 뭐냐... 시리얼이라도 사다 먹고, 그것도 안되면 우유라도 꼭 먹고 가.'


  하지만 모든 자취생들이 그렇듯 시간이 흐르면서 '밥'대신 '잠'을 택했다. 그리고 아침에 꼭 스타벅스 아이스 바닐라 라테 한잔을 사서 밥 대신 그걸 마셨다. 그렇게 한 달, 두 달 지나자 몸에서 반응이 왔다. 이건 아니다 싶어 큰 맘먹고 마트에서 사 온 시리얼과 우유를 부어 먹고 간 날, 하루 종일 위가 아파 죽도록 고생을 했다. 갑자기 아침이란 걸 먹어서 그랬는지, 급하게 먹어서 그랬는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해서 아프고 나니 자연스럽게 시리얼과 멀어졌다.




  그랬던 내가 다시 요새 시리얼을 먹고 있다.

  맛이 있어서가 아니라, 배고파서. 가장 효율적으로 배를 채울 수 있어서. 차리고 치우기 간단해서.

 

  먹은 지 일주일 넘은 지금, 다행히 위가 아프진 않다. 아이가 깨기 전까지 2시간 남짓 배고프지 않게 작업을 할 수 있고, 커피를 먹어도 속이 쓰리지 않으니 목표는 얼추 달성한 셈.


  그런데 시리얼로 시작하는 아침은 나의 위를 달래주었지만 마음은 달래주지 못한 것 같다. 사실은 커피 한 잔을 제대로 먹기 위해 억지로 배를 채운 것이기에,  맛의 즐거움도 한 끼의 여유로움도 없이 그저 '해치우듯' 먹어버린 것이기에 다 먹은 빈 그릇을 보아도 허전하다. 가족 중 한 명이라도 깰까 두려워하며 쫓기듯 먹다 남긴 잔해를 보면 괜히 슬프다. 이게 다 저, 시리얼 때문이야, 라며 근본 없는 악의를 퍼붓다 문득 생각해본다. 정말, 그러한가?


  워낙 입이 짧은 나이기에 밥은 그저 공복감만 없애주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밥'을 먹는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고 믿어 왔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나는 꽤나 관계지향적인 사람이었고, 나에게 밥을 먹는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었던 것이다.


  밥을 먹는다는 것은 아주 의미 있는 일이다. 함께 먹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앞에 놓인 음식의 맛을 공유하며, 다 먹은 후의 느낌을 나누는 과정이다. 그래서 "언제 밥 한 번 먹자"는 말로 인간관계를 시작하지 않은가. 그런데 수년간 나의 아침에 '관계'는 없어진 지 오래다. 자취할 때도, 신생아를 키우던 시절도, 그리고 복직을 해서 장거리 출퇴근을 하는 지금도 아침만큼은 혼자서 대충 먹는 게 익숙해진 것이다.


  나눔이 없는 식사는 나를 아프게 해 왔다. 자취할 때 시리얼을 먹고 아팠던 것은 사실  '혼자'라는 외로움 때문이었을 게다. 복직하고 수차례 위경련에 시달린 이유도 단 하나. '편안함'이 사라진 '밥' 때문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 사실을 깨닫자, 시리얼에게 미안해졌다. 시리얼은 죄가 없다.

  

  이제는 불혹을 바라보는 나이.

  잃어버린 아침을 되찾고 그 안에 뭔가를 더 담은 '따뜻한 한 끼'를 먹고 싶다.

  그것이 무엇이든 좋다.

  해치우는 아침이 아니라, 채우는 아침을 먹고 싶다.


  온 가족이 함께 했던, 아무리 혼자 먹어도 아프지 않았던

  90년대, 그 시절 엄마의 밥상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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