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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Jul 18. 2021

반쪽짜리 빙수임에도 불구하고

더운 여름, 엄마의 엄마가 되던 날

 000님에게 선물과 메시지가 전송되었습니다.


  무뚝뚝한 딸내미라 오글거리는 멘트는 적지 못했다. "더운데 이거 먹고 건강 챙겨." 뒤에 "사랑해 엄마."라든가, "고마워 엄마" 따위를 적고 싶었는데 그건 아주 깊은 마음속 어딘가에 넣어 두었다. 나중에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당장은 표현이 어려운 게 자식 마음이라.



몇 분 뒤,



- 헉

= 엄마 빙수 좋아하니까. 이거 맛있더라.

- ㅋㅋㅋㅋ

= 이거 쿠폰 쓰는 방법은 알아?

- 언니가 지난번에 해 주더라.
= 그래, 그렇게 하면 돼.

- 고맙다, 잘 먹을게.




  함께 살 때에는 몰랐는데, 결혼 후 '엄마'가 되니 '엄마'가 보이기 시작했다.

  밤새 보채는 아기를 어르고 달래며 겨우 재운 새벽녘이나,  휴직 중 남편의 퇴근 시간만 되면 언제 오나 발을 동동 구르던 늦은 오후나, 아니면 불규칙적인 식사로 망가져 수시로 얹히고 토한 후 변기를 붙잡고 엉엉 울던 저녁 언저리가 되면 엄마가 불현듯 생각났다. 넉넉하지 않은 살림, 작은 가게 하나 운영하며 아침 일찍 나가면 밤 11시는 되어야 들어오는 아빠를 기다리며, 늦은 겨울밤 단칸방에서 곤히 자는 아이들을 두고 때 맞춰 연탄을 갈며 혼자 아이 둘을 키워 냈던 엄마가.



  그러자 엄마의 취향도 보이기 시작했다.

  언젠가 여름의 일이다. 친정집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때우다 냉동실 문을 벌컥 열었다. 냉동실엔 엄마가 야무진 손끝으로 정리해 놓은 고기들 사이에 빙수 아이스크림이 가득 들어 있었다. 엄마는, 애도 아니면서 무슨 이런 걸 넣어놔. 요새 애들은 저런 아이스크림 좋아하지도 않는데,라고 생각하며 다짜고짜 엄마를 불러댔다.



= 엄마, 엄마! 이게 다 뭐야?

- 롯데리아 빙수는 너무 비싸잖니. 여기에 우유 넣어 먹으면 맛있다.



  웃으며 말하던 엄마는 입맛을 다셨다.



- 가만있어봐, 이거 청소만 끝나면 하나 먹어야겠다. 너도 먹을래?

= 이런 거 먹지 말고 더 좋은 거 먹어!

- 얘는. 이게 뭐 어때서? 맛만 좋구먼.



  문득 과거의 기억들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더운 여름이 되면 시원하게 샤워하고 빙수를 사 먹자던 엄마. 롯데리아 빙수는 맛이 있는데 조금 비싸지 않냐면서 요새 빙수는 왜 이렇게 비싸냐고 타박하던 엄마, 아줌마들하고 수다 떨면서 커피 대신 빙수를 먹던 엄마. 임신했을 때, 남편이 보내준 과일빙수를 함께 먹으며 '맛있다'는 말을 수차례 내뱉던 엄마. 그리고 이 걸 이제야 알아채버린 눈치 없는 나까지.



  괜히 슬퍼졌다. 엄마가 빙수 아이스크림을 꺼내어 맛있게 드시는 모습을 보는 게 불편해졌다.

  괜히 민망해졌다. 언젠가 엄마가 하던 말이 꼭 맞아서.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단다."라고 말하던 엄마에게 그렇지 않다고, 나 엄마한테 효도할 거라고 다짐하던 지난날의 내가 부끄러워졌다.



  아, 우리 엄마는 내가 여름엔 오이소박이만 먹는다는 걸 알고 늘 여름만 되면 오이소박이 한 통씩 해서 보내주는데. 우리 엄마는 내가 닭볶음탕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집에 온 날 저녁엔 늘 닭볶음탕을 한 솥 끓여주었는데. 내가 5일장에서 파는 봉지 김만 먹는다는 걸 알고, 부러 시장에 나가 김만 여섯 봉을 사다가 보내주는데. 다른 집 딸 들은 결혼 전에 엄마랑 데이트도 하면서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든다는데 난 그동안 뭘 했나.



  불편한 마음은 떳떳하지 못했던 과거를 불러냈고, 그 과거들은 켜켜이 쌓여 내 죄책감이 되었다. 엄마가 한 그릇의 빙수를 다 비우는 순간까지 난, 한 입도 먹지 않았다. 아니 먹지 못했다.  

 


  벼르고 별렀다. 여름이 되면 꼭, 엄마에게 빙수를 선물하리라. 친정 집에 가면 꼭, 맛있는 빙수를 배달하리라. 엄마가 좋아하는 연유와 팥이 듬뿍 들어간 빙수를 시켜 같이 먹으리라.



  

  하지만 뭐가 그렇게 바쁘고 힘들었는지 나는 그 일이 있고도 2년이 지난 지금에야 엄마에게 빙수를 선물했다. 비싸지도 않고, 특별하지도 않은 7,500원짜리 빙수를 선물하면서도 사랑한다는, 고맙다는, 엄마 덕분에 내가 이렇게 바르게 컸다는, 진짜 속 마음은 하나도 보이지 못한 반쪽 짜리 빙수를 이제야 보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기뻐했고, 고마워했다. 마음을 표현하는데 돈이 전부가 아니란 것을 알지만 평생 고생한 엄마에게 너무 값싼 선물을 보낸 것 같아 불편했던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생각해보면 내가 어릴 적 엄마에게 받은 사랑이 모두 값비싼 물건으로만 얻어진 것은 아니지 않은가. 약하디 약한, 내성적이고, 잘 삐지는, 편식도 정말 더럽게 심한 둘째 딸내미가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 끊임없이 생각하고 살펴보고, 물어보면서 얻어 낸 엄마의 '관심'이 만들어낸 사랑 덕분에 이렇게 밝고 건강하게 잘 자라지 않았나. 엄마 덕분에. 오롯이 엄마 덕분에.



  그렇게 생각하니 나도 이제 '엄마'의 '엄마'가 되고 싶어 졌다. 엄마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나도 엄마를 생각하고, 살피고, 물어보면서, 엄마가 살아온 삶에서 만들어낸 작으면 작고 크면 큰 취향을 찾아 사랑해주고 싶다. 그 시절 엄마들이 그러하듯 섬세하게 사랑받지 못해,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 쌓여있는 마음들을 내가 발견해 다듬어 주고 싶다. 그러면 엄마는 내가 엄마에게 평생 받았던 사랑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을까?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제, 엄마에게 카톡이 하나 왔다.



- 오늘 빙수 먹어야지 ㅋ



  파리바게트에 가서 내가 보낸 선물을 빙수로 바꾸고, 보냉백에 담긴 빙수를 들고 신나 집으로 돌아오는 엄마의 모습이 그려진다. 여중생처럼 신난 발걸음이 이곳까지 느껴진다.



  오늘도 어제처럼 덥기를. 그래서 내가 엄마에게 또 빙수를 보낼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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