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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Mar 08. 2022

국민장난감이 사라졌다.

결국은 '함께'하는 게 중요해  

4,000원짜리 공 하나


1,000원에 100개 들어있는

다이소 종이컵 한 줄


큰맘 먹고 산 5,000원짜리

미로 찾기 책 한 권


그거면 충분해

어딜 나가지 않아도

뭘 더 사지 않아도


우리는 충분해

더할 나위 없이




요새 폴리로 갈아 탄 녀석이 한참 보다 지겨웠는지 설거지하는 나를 찾아왔다. 엄마 심심해, 하면서. 주말 내내 집안일하느라 제대로 놀아주지 못한 게 미안해 당장 할 일만 해치우고 앞치마에 젖은 손 급하게 닦은 후 녀석 앞에 앉으니 어제 하던 미로를 이어서 하고 싶단다. 엄마는 파란색 저는 초록색 색연필로.


어렵지 않은 일이나 며칠 동안 계속하던 놀이가 지루하기도 하고 좀 새로운 걸 놀고 싶어 장난감을 찾아주려고 쿠팡을 뒤적이는데 딴짓하는 나를 발견한 녀석은 이내 엄마, 엄마! 하고 부른다. 이미 했던 미로 찾기라 답을 다 아는데도 다시 그 길을 돌아 돌아가고 정답 길을 색칠하며 즐거워한다. 멈춰, 아니야, 맞아! 하며 기뻐하는 과정을 지켜보는데 참 귀엽다.


그동안 다양한 장난감을 사주었었다. 맘 카페에서 유명하다는 것, 인스타에서 추천하는 것들 중 썩 괜찮은 것들을 나름 골라서 사주곤 했던 것. 가령, 콩순이 카페 놀이, 쥬쥬 마법의 성, 엘사 인형, 뽀로로 계산대 같은 것들 말이다. 새로운 장난감을 받으면 처음엔 잘 놀다가도 점점 관심이 시들어지더니 나중엔 생각보다 잘 놀지 않았다. 우리 딸이 국민이 아닐 리 없으나 국민 장난감이라 불리는 것들은 실상 딸에게 의미 없는 경우가 많았다.


대신 값싸도 '함께' 놀 수 있는 것들엔 크게 반응했다. 엄마와 혹은 아빠와 함께할 수 있는 놀이라면 어떤 것이든 좋아했다. 몇 년 전 금쪽같은 내 새끼에서 한 번 봤던 봤던 종이컵 성 쌓기라든가, 쿠팡에서 4,000원 남짓 주고 산 핑크퐁 탱탱볼로 공 받기 놀이라든가, 지금 너무나 좋아해 매일 같이 반복하는 미로 찾기 책 같은 것, 다이소에서 5,000원 주고 산 콩순이 색칠놀이는 함께 혹은 혼자 하면서도 시간이 가는 줄 모르게 놀았다.


그마저도 떨어지면 녀석은 멋들어진 장난감을 또 사달라고 하기보단 집에 있는 것들을 십분 활용해 놀았다. 설거지하는 내 옆에서 잔뜩 꺼내 든 스테인리스 그릇을 모자랍시고 쓰기도 하고 뒤집어서 북이라고 두드리기도 하며 폼롤러를 낑낑거리며 들고 와 나무라며, 물을 주어야 한다고 하기도 한다. 또 침대 위에서는 팡팡 뛰면서 트램펄린 타는 놀이를 하다가 얇은 이불을 망토처럼 뒤집어쓰고는 엘사라며 노래를 부르는데 머릿속에서 무한대로 뻗어나가는 상상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그러고 보니, 아이가 원하는 건 다양한 장난감이 아니라 엄마 아빠와 함께하는 놀이 그 자체가 아닐까 싶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새롭고 신기한 5세. 머릿속에서 무궁무진한 생각들이 넘쳐흐르는 때에 끝없이 펼쳐지는 제 상상력을 마음껏 드러내고 싶은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누군가와 함께하는 것, 그 자체가 즐거운 것이 아닐까 싶다. 아직은 친구도, 형제도 많지 않은 녀석을 온전히 받아들여주는 것은 결국 엄마와 아빠니까 녀석은 번쩍번쩍한 장난감 대신에 작은 아이디어도 함께 손뼉 쳐 줄 '우리'가 필요했던 것은 아닐는지.


이런 딸 덕분에 언제부턴가 나는 '국민'이라고 붙은 모든 것들에 소홀해지기 시작했다. 꼭 사야 해, 강추, 가성비 최고의 아이템이란 말에 현혹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집에 있는 물건들로 재밌게 놀 수 있을까를 궁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행히 나 역시 어릴 적 그렇게 놀았던 기억이 있어 어렵지 않으나 아이의 수준에 맞게 놀기 위해 수없이 머리를 굴려야 하는 게 나름의 고충이랄까.


요새 우리가 꽂힌 놀이는 막춤 추기랑 엉덩이 터널 지나기.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춤을 추는 녀석의 모습이 귀여워 따라한 건데 자신을 따라 하는 엄마가 신기해 죽겠는지 엄청 좋아해서 나도 함께 춘다. 스트레스 잠시 내려놓을 수 있어 좋다. 그리고 엉덩이 터널 놀이는 몸을 터널처럼 만들어 지나가는 놀이다. 내 몸을 한 번 지나가고 꼭 자기 밑으로도 지나가라고 하는데 너무 작아서 내 머리는 들어갈 수가 없다. 그러면 꼭 "너무 작잖아"라는 말을 해줘야 깔깔 거리며 좋아한다.




유년시절의 기억은 사실 '감정'만 남는다고들 한다. 너무 어릴 적엔 무엇을 했는지조차 기억하기 어려워 그때의 '감정'만 고스란히 남는다고. 우리 딸과 함께 한 이 시간들이 아이에게 어떤 감정으로 남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감정에 색깔을 붙인다면 나는 가장 좋아하는 파란색을 붙여줄 테다. 녀석의 감정 색깔은 가장 좋아하는 빨간색으로 가득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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