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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Apr 04. 2022

엄마의 빨간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방법

요새 우리 딸은 그림 그리기에 푹 빠져있다. 크레파스를 손에 쥐고 스케치북에 그리는 그림이 아니라, 아이패드 '프로 크리에이트' 앱을 켜고 손가락으로 그리는 그림 말이다. 며칠 전 우연한 기회로 한 번 해보라 한 것이 흥미로웠는지 요즘 틈만 나면 '손가락으로 그리는 그림'을 찾는다. 등원 길에도 하원 길에도 잠을 자기 전에도, 일어나자마자도 항상 '그 손맛'을 찾고 있다.


내가 소개해준 길. 내가 알려줘 놓고선 안된다고 무조건 막는 건 아니다 싶고, 제대로 놀아주지도 못하면서 유튜브만 주야장천 틀어주는 것보다는 정확히 시간을 제한하고 실컷 그리게 한 다음에 각자 할 일을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어 아예 각 잡고 여러 가지 기능을 가르쳐 주고 있다. 모름지기 그림이란 하얀 스케치북에 알록달록한 크레파스로 색칠하는 것만 알던 녀석에게 '터치' 한 번에 색깔이 온전히 채워지는 '프로 크리에이트'는 그야말로 환상의 세계.


다양한 색을 직접 선택할 수도 있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브러시를 고를 수 있으며 한 치의 삐침 없이 빼곡히 예쁜 색깔로 채워지는 것 자체만으로 녀석은 충분히 흥분했고 충분히 몰입했다. 단순히 선을 그어대기만 하던 녀석이 '채우기' 기능을 습득하자마자 신이 나서 이것저것 칠 하자, 나 역시 덩달아 신나서 검은색 선으로 밑그림을 그려 주고 본격적으로 함께 놀기 시작했다.


가령 그런 것이다. 내가 "뭘 그릴까?" 하고 물어보면, 녀석은 "포도"라고 답한다. 그럼 나는 완벽함을 내려놓고 정말 편하게, 그러니까 솔직히 말하면 대~충 선을 따서 그려 준다. 그러면 녀석은 그 안에 제 머릿속에서 생각한 '포도색'을 찾아 채운다. 색을 끌어당겨 원하는 칸에 올려놓는 순간 마법처럼 색이 깔끔하게 칠해진다. 그걸 보자마자 손뼉 치며 너무 잘했다,라고 칭찬해주면 녀석의 어깨는 올라갈 수 있을 만큼 높이 솟아 있다. 기쁜 것이다. 뿌듯하기도 하고, 재밌기도 하고.


그런데 문제는 내가 가끔 아이의 색감에 진한 빨간펜을 들이댄다는 데 있다. 원래도 사물의 '정해진 색'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터라 포도를 노랗게 색칠하고, 해를 파랗게 색칠하는 걸 잘 용납하지 못한다. 어렸을 때도 그랬고 커서도 꾸준히 그래 왔다. '그래야 하는 색'이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게 싫다. 내 마음에서 아주 강한 '불편함'이 고개를 든다. 그러다 보니 아이가 색칠할 때 자꾸 내 기준에서 어긋나는 색을 고르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포도는 보라색이고, 바나나는 노란색이잖아. 딸기는 빨간색이고. 하나, 둘씩 개입하다 보니 아이가 슬쩍 주춤한다. 곁에서 운동하며 지켜보던 남편은 나를 나무라며 말한다. 상상하는 건데 왜, 그걸 막아.라고.


순간, 아차 싶었다. 즐겁자고, 편하게 색칠하고 놀자고, 네 머릿속에 담긴 생각을 자유롭게 펼쳐보자고 시작한 일인데 결국 또 '정답'을 찾아 방향을 잡아주는 나를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내가 하는 일이 주로 이런 성격이다 보니 집에서도, 제 자식에게도 그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또 빨간펜으로 정답을 체크해주고 있는 꼴이라니. 부끄럽고, 조금은 우습기도 하고.


자유롭고 창의적인 아이로 자라기를 바랐다. 어릴 적 보수적인 집안 분위기와 내 기질이 합쳐져 '답'이 아닌 길은 쳐다보지도 않았던 지난날이 후회되어 내 아이만큼은 좀 더 편안하게, 조금 더 행복하게 클 수 있게 돕고 싶었다. 그런데 아직은 부족한 듯싶다. 그럴 수도 있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하는 유연한 생각이 머리에서 마음까지 내려오진 못한 듯싶다. 분명 머리로는 가능한 일이 실전에선 자꾸 실패하는 걸 보면 말이다.


그럼에도 다행인  아이는 아직 다섯 살이고,  역시 아직은 다섯 살짜리 엄마이며,  곁엔 언제고 나의 '틀에 박힌' 생각을 지적해줄  있는 남편이 있다는 .  생각해보면 어린아이가 그릴  있는 도구를 종이에서 태블릿으로 확장한 것도 고정관념 깨기의 시작이 아니겠냐는 . 그러니, 우리 아이는 앞으로 조금  행복해질 일만 남았다는  덕분에 아직은 나의 빨간펜이 두렵지만은 않다.


초록색 컵케익과 보라색 TV (이런 색 조합을 견디기가 힘들다. ㅠ.ㅠ 극복(?) 해야겠지...)
빨간색 하트와 주황색 오이. 오이처럼 생기지 않았지만.. 오이다. 주황색 오이라니... 노각인가. 그런 것인가. 벌써 노각을 아는 것인가.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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