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글감만 세 개째 정리하고 있다. 항상 아이폰 메모 앱을 사용하거나 아이패드 굿노트, 혹은 이면지에 쓱쓱 개요를 짜곤 했는데 오늘은 왠지 작은 노트에 적어보고 싶어서 책장에 꽂혀있던 것을 하나 꺼내어 보았다. 작년에 친한 분이 준 것을 이제야 꺼낸다. 노트에 담긴 그날의 분위기가 문득 생각나 기분이 좋아졌다.
요새는 일어나면서부터 잠이 드는 순간까지 너무나 정신이 없다. 등원과 출근, 고객 상담(?)과 자잘한 업무처리, 그리고 하원과 이후 육아를 마치는 그때까지 사정없이 나를 몰아치는데 정말 미칠 지경이다. 그나마도 아침엔 도시락을 싼다고 새벽 5시 30분에 기상, 밤에는 밀린 집안일, 직장일을 한다고 새벽 1시를 넘겨 자는 적도 많으니 아직까지 아프지 않은 게 신기하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저녁 시간에 여유가 많이 생겼다. 세탁기만 윙윙 돌아가는 거실에 앉아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한참을 가만히 있으니 정신없던 하루하루를 보내며 켜켜이 쌓였던 삶의 조각들이 둥둥 떠다니기 시작했다. 뒤돌면 잊을까 두려운 마음에 노트를 꺼내어 정리하기로 마음먹고, 지금 나는 펜 하나를 쥐고 노트에 정말 생각나는 대로 이것저것 적고 있다.
유난히 집중까지 잘 된다. 얽혀 있던 생각의 매듭이 술술 풀리며 글의 흐름도 덩달아 매끄러워진다. 지하철 난리통 속에서는 도통 떠오르지 않던 문장도 무심결에 툭, 튀어나온다. 몇 년 만에 처음 느끼는 감정이다. 놓치기 싫어진다. 설령 글 한 편을 완성하지 못하더라도 오늘만큼은 그동안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손으로 적어보려 한다. 제 힘으로 써 내려간 글감, 그리고 그 글씨를 보면 어쩐지 둥둥 떠 있는 내 마음도 조금은 차분해질 것 같다.
오늘은 그런 날이다.
글을 완성하는 것보다 이야기를 생각하고, 정리하는 것이 좋은 날.
그런 날은 저축하듯 이야기를 마구마구 적어보는 것이다.
그것은 글쓰기와 다름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