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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May 16. 2023

어서 와, 수족구는 처음이지?

티니핑과 함께 한 가정 보육

코로나 덕분일까. 아주 어린 나이 때에 수족구나 구내염 없이도 잘 지나갔었다. 기관 생활을 늦게 하기도 했고 마스크를 꼼꼼히 쓰다 보니 전염병에 걸릴 확률 자체가 낮았던 것. 하지만 위드 코로나가 되며 마스크를 슬슬 벗자 아이의 면역력은 밑천을 다 드러내기 시작했다.


각종 감기 바이러스로 두어 달 고생을 하더니만 수족구까지 찾아와 버렸다. 어찌 보면 코로나 격리보다도 더 잔인한 수족구는 전염력이 워낙 강해서 외출 자체를 할 수가 없다. 아이들이 집단생활을 하는 유치원, 어린이집은 당연히 갈 수 없는 상황. 3~4일만 쉬면 금세 등원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나의 안일한 판단을 비웃기라도 하듯 진료를 보던 원장님은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은 애매해요. 등원은 당연히 불가능하고요.”


아... 예상대로라면 수요일까지 (그러니까 내일까지)만 어찌어찌 친정 엄마의 도움을 받아 아이를 가정 보육하고 목요일엔 등원을 시킬 예정이었다. 그런데 수요일에 다시 한번 진료를 보자니! 정말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당장 목, 금요일에 학교에서 강사를 구해 보신다고 했지만 그게 안 되면 최악의 경우 아이를 데리고 출근을 해야 할 판. 그나마 학기 중에 강사님을 모시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 마음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이러다 진짜... 강사도 못 구하고 애도 추가 격리를 해야 한다면...?


머릿속에 어지러워지자 잠조차 오지 않았다. 부랴부랴 있는 인맥 없는 인맥을 다 동원하여 연락을 취했지만 5월 중순, 애매한 시기, 짧은 기간의 수업을 대체해 줄 인력은 쉽사리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발만 동동 구르다가 멀리 살고 계신 시어머님께 도움을 청하여 진료 결과가 어떻게 되든 간에 목, 금요일에 아이를 봐주십사 부탁드렸다. 기꺼이 달려와 주시겠다 한 어머님께 느낀  감사한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물론, 갑작스러운 딸내미의 연락에 싫은 소리 한 번 없이 좋아하는 김, 불고기, 오이소박이 잔뜩 해서 한달음에 찾아온 친정 엄마는 말할 것도 없고.


아이를 키우면서 일을 하는 동안 친정이나 시댁의 도움을 받은 적이 사실 거의 없다. 원거리에 살고 있기도 했지만 남편과 내가 가능하면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해 보자고 마음먹은 데다 너무나 고맙게도 아이가 크게 아프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올 해는 뭔가 다르다. 나와 일찍 움직이는 탓에 힘들어서 그런지 우리 딸이 많이 아프고, 덩달아 나까지 일과 육아 사이에서 자꾸 중심을 잡기가 힘들다. 일은 일대로 육아는 육아대로 다 제대로 못하는 기분. 내 욕심에 아이를 자꾸 아프게 하는 기분.


예전에 한 맘카페에서 ‘수족구‘가 얼마나 끔찍한 지를 성토하는 엄마들의 글을 본 적이 있다. 그때 우리 딸은 돌을 갓 지나 집에서 데리고 있던 때라 그 글과, 댓글에 완전히 공감하지 못했었다. 그렇구나, 그런 거구나, 하는 정도? 그런데 막상 워킹맘으로 일을 하면서 아이가 아픈 것을 겪다 보니 그것도 완치 확인서가 없이는 절대 유치원에 갈 수 없는 무적의 수족구(?)를 한 번 겪고 나니 엄마들에 왜 그렇게 전염되는 병에 극도로 신경이 곤두섰는지 너무나 잘 알겠다.


당장 기관을 가지 않으면 아이를 돌봐줄 수 있는 친정 부모님, 시댁 부모님이 지척에 살고 계시지 않는 이상 부모의 출근부터 퇴근까지 아이를 온전히 안전하게 봐줄  사람을 찾기가 너무나 힘들다는 것을 이제 뼈저리게 느끼게 된 것이다. 돌봄에 공백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당장 일을 멈추고 아이에게 달려가기엔 현실적인 문제로 얽혀있는 것이 너무나 많다는 것도 제대로 알게 되었다. 문득, 임신했을 때 주변에서 왜 그렇게 “친정 옆에 살아. 옆 동이면 더 좋고. 못해도 30분 안에 오실 수 있는 위치면 괜찮아.”라고 그렇게 나보고 이사를 가라고 했는지,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새삼 깊이 와닿는다.


조카들은 어려서부터 키워 익숙하지만 우리 딸은 가끔 봐서 성향 파악이 안 된 친정 엄마와, 할머니와 이렇게 오랫동안 있는 것이 처음이라 어색하고 불편하며 약간은 긴장할 딸내미를 위해 며칠 전에 미리 준비한 티니핑 각종 장난감(이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으나 그런 종류의 것들)이 오늘 엄마와 딸 사이를 조금 가깝게 해 준 것 같다. 쉬는 시간 중간중간에 “별일 없어?”라고 보낸 내 메시지에 “잘 논다”며 보낸 아이 사진 속에 빠지지 않은 것이 티니핑 색칠놀이였으니 고작 10,000원도 안 되는 돈으로 참, 괜찮게 하루를 보낸 것 같다.


나 어릴 적 한 번도 색칠놀이, 인형놀이, 동화책 읽기를 해준 적 없는 우리 무뚝뚝한 나의 엄마가 손녀와 함께 보냈을 10시간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이 놀잇감이 할머니와 손녀를 조금이나마 연결해 주는 연결 고리가 되었다면 지불한 값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아이도 잠들고 친정 엄마도 코까지 고시며 잠든 이 시간. 하루 종일 놀았다던 색칠놀이 책을 훑어보니 그 어려운 그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색칠한 것이 눈에 들어온다. 한 장 한 장에 엄마의 마음이 느껴진다.


모두가 애쓴 하루가 저물어 간다.

텅 빈 스케줄을 겨우겨우 채운 나도

갑자기 들어찬 스케줄을 해결해 준 친정 엄마도

여전히 길눈이 어두운 엄마를 위해 장시간 운전도 마다하지 않고 달려온 친정 아빠도

이제 곧 찾아올 스케줄을 앞두고 약간 긴장하고 있을 시어머니도

무엇보다도 모든 상황을 함께 겪으며 마음 쓴 남편도

고생했다. 애썼다.

토닥토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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