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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May 26. 2023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는 거짓말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는 것은 거짓말이다. 어떤 구애도 받지 않고 술술 써 내려가는 글이라는 것은 더욱 거짓말이다. 


한 시간째 컴퓨터 앞에 앉아있다. 괜히 정리하면서 노트에 메모하면서 음악도 들으면서 키보드도 블루투스로 바꾸어 보면서 시간을 보내고 보내고 전혀 써지지 않는다. 


거창한 것을 쓰려고 하는가? 

아니다. 그저 학교에서 일어난 일을 정리해서 남기고 싶은 것이다. (거기에 조금 많이 공감도 받고 싶은 정도?)


글을 쓸 수 없는 환경인가?

아니다. 아이는 자고 좋아하는 음악이 나오고 있으며 적당히 선선하고 딱 좋다. 


글감이 부족한가?

그럴 리가. 머릿속에, 그리고 노트에 정리해 놓은 글감만 수십 개다. 다 쓰려면 매일 써도 모자를 이야기가 화수분처럼 넘쳐흐른다.


혹시 컨디션이 안 좋은가?

이건 세모.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선잠을 깨고 일어나서 힘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개운하기도 하다. 문제는 글을 못 쓸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왜?

하며 마음을 들여다본다. 김첨지가 아내에게 설렁탕을 사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냐며 펑펑 울던 심정과 꼭 같다. 아니 시간도 되고, 글감도 넘치고, 컨디션도 나쁘지 않은데 도대체 왜! 난 왜! 그 쉽다는 붓가는 대로 쓰는 글 한 편을 완성하지 못하는 것인가!? 답 없는 물음이 머릿속에서 뱅뱅 돈다. 돌고 돌다가 결국 다시 나에게 돌아온다.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수십 분 동안 멍하니 앉아있는 아이들에게 특히 연필을 쥐곤 아무것도 써 내려가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무척 다정하고 친절한 말투로 꼭 했던 말이 있다. 


"괜찮아. 완성 안 해도 돼. 그냥 네가 하고 싶은 말을 두서없이 써봐. 그래도 돼."


그러면 보통 아이들은 뭘 쓸지 엄청 고민을 하다가 끄적이곤 했고 그런 끄적임이 30분 정도 이어지면 꽤 괜찮은 글 한 편이 완성되곤 했다. (물론 엄청난 퇴고가 필요했지만) 완성한 글을 보고 뿌듯해하는 아이들을 보면 괜스레 나도 뿌듯해지곤 했더랬다.


그런데 지금 난 그 말이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괜찮긴 뭘 괜찮으며, 

완성을 안 해도 되기는 뭘 안 해도 되며,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커서가 깜빡거릴 때마다 도통 문장 하나가 완성이 안 되는 이 마음을 네가 알아? 아느냐고!!


따지고 있다. 그러니까 내가 나에게 따지고 있는 셈이다. 

도저히 이 울분(?)과 막힘(?)을 견딜 수 없어 새로운 페이지를 켜고 여기에 하소연하듯 옮긴다. 


더 짜증 나는 것은 이렇게 비계획적으로 쓴 글은 정말 말마따나 술술 써진다. 깊이 생각하고 쓰지 않아서 인지, 아니면 정말 지금 하고 싶은 말이 날것 그대로 술술 나와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솔직한 내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그런데 원래 쓰려고 하던 글감을 쳐다보면 다시 마음이 먹먹해진다.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한 글자도, 한 문장도 써지지 않는 이유. 


안다. 

해답은 나에게 있다는 것.

그 해답을 찾기 위해서 어쨌거나 나 스스로 많이 노력해야 한다는 것.


세상엔 알면서도 잘 안 되는 것이 있다.

오늘 나에겐 바로 이것이 그것이다.


이제 오늘은 9분 남았다.

9분 후면 나는 치열한 예약 하나를 끝내고 진짜 하루를 마무리해야 한다.

그전까지 잘 들여다보자.


붓 가는 대로 쓰지 못하는 나의 진짜 이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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