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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Jan 29. 2024

볼펜 한 자루


볼펜 한 자루를 

손에 쥐고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이 새삼스럽다.


평소라면 절대 사지 않았을 

이 볼펜엔 

특별한 사연이 있다.




커피에 진심인 나는

일본 여행을 준비하면서 '카페'에 대한 기대가 

무척이나 높았다.


특히 나카메구로에 있다는,

전 세계에 6곳 밖에 없다는,

스타벅스 리저브 로스터리 도쿄, 매장에 방문하는 것,

블루보틀 커피 1호점에 방문하는 것,

카페 마메야에 방문하는 것,

그래서 원두를, 

드립백을 사 오는 것이

나의 아주 원대한 꿈이자, 목표이자, 여행의 방향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도착한 

스타벅스 리저브 로스터리 도쿄는

유튜브 영상에서 미리 보았던 것보다 

실로 엄청났다.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커피를 

고르고 있었으며,

영어로 응대해 준 직원들은

무척이나 친절했고,

쇼케이스에 담긴 디저트는 

구미를 당기기에 충분했다.


평소라면 절대 먹지 않았을

고가의 커피 한 잔을 시키고 (1,200엔)

딸아이에게는 그림 노트를 하나 쥐어주고

3층 어딘가에 자리 잡아 창밖을 바라보는데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스타벅스라면 전 세계 어디나 균일한 맛을 제공하는

대표적인 프랜차이즈 카페라는 편견이

사라지게 만드는 그 무언가를 마음 깊이 느끼며

왜 그 옛날 교토 스타벅스, 

그러니까 산겐자야였나, 하는 곳에 있던

유니크한 그곳은 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느끼며 

1,200엔짜리 커피를 천천히 아껴 먹고 있을 뿐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스타벅스 특유의 정취를 즐기며

사람들을 구경하며

간간이 들리는 한국어에 반가움을 느끼다 

문득, 이곳을 기억에 남길만한 

무언가를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1층으로 내려가 구경하는데 

앞서 보고 온 남편이 추천한 머그컵은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마음에 콕- 하고 와닿는 볼펜이 눈에 띄었다.


바로, 트래블러스 컴퍼니와 스타벅스의 콜라보 작품으로

이곳에서만 판매하는 볼펜. 

2,000엔 정도 할까 싶어 물어보니 무려 3,400엔.


너무 비싸 한참을 고민했다.

평소라면 절대 사지 않았을 가격이니까.

아무리 엔저라 하지만, 볼펜 하나에 30,000원이 넘는 것은

아무래도 좀, 과하지 않나 싶어서.


그런데도...


계속 눈에 밟혔다.


마침 트래블러스 컴퍼니라는 여행자들을 위한 문구점이

휴업일이었고,

나는 한국에서부터 트래블러스 컴퍼니를 꼭 한 번은 가야지,

하고 계획하고 있었는데,

어쩌면 운명적으로 스타벅스와 함께 콜라보한 볼펜이 있다니!

게다가 디자인도, 사이즈도 완전 마음에 쏙- 들다니!


망설임은 후회를 부를 것 같았다.

교토에서 일본풍의 스타벅스를 가보지 못한 것처럼,

뉴욕에서 모마를 대충 훑어보고 아쉬움을 느낀 것처럼,

시드니에서 그 날씨를, 풍경을 즐기지 못한 것처럼.


곁에 있던 남편의 한 마디에 힘입어

홀리듯 1층으로 내려가 구입한 펜.

그 펜이, 지금 내 손에 들려 있는 펜이다.




한국 와서 편지지에, 일기장에(아침과 커피와 일기장^^)

적어보니 정갈하게 써지는 글씨가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


만약, 내가 그때 

끝까지 망설였다면 이 기분은 느끼지 못했겠다 생각하니

새삼, 삶을 바라보는 관점까지 바뀐다.


나는 언제나 루틴을 만들어 그대로 생활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내면의 불안을 다스리기 위한 나만의 방법인데

한 번 익숙해진 것은 절대 바꾸지 않는 것이 마음이 편했다.

금욕적인 편이어서 물건을 사거나,

모으거나, 하는 것에도 관심이 없었다.

정리를 잘 못하는 성격도 한 몫했고.


그러다 보니, 

계획에 없는 지출이나 생각보다 큰 금액의 지출은

늘 망설였다. 한 번 더 고민해 보겠다는 이유로

타이밍을 놓치고 잊어버리곤 했다.

다시 기억나지 않는 것은 그만큼 인상적이지 않았던 

것이라고 다독이면서.


그렇게 흘려보낸 생각들이 모두 다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마음속에 강한 '틀'을 만들어 두고

그 안에서만 움직이려는 나의 루틴을

한 번 정도는 스스로 깨 보는 것이

삶을 조금 더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가격에 놀라 멈칫하지 말고

정말 의미 있는 것이라면

꼭 남기고 싶은 것이라면

기억하고 싶은 것이라면

가끔은 즉흥적으로 무언가를 

사거나, 경험해 보는 것도

좋겠다, 하는 생각 말이다.




앞으로 나이가 들면 들수록

나의 관념은 더 단단해질 것이다.

그동안 살아왔던 시간들은

머릿속에 고스란히 쌓여

나만의 고정관념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들을

판단할 것이다.


그런 마음이 들 때,

그런 스스로가 어쩐지 갑갑하게 느껴질 때.

24년, 1월 언젠가 

도쿄에서 

마음 가는 대로

펜을 샀던,

그날을 기억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편지를 쓸 테다.


스스로를 가두지 말라고.

마음을, 생각을, 열어 보라고.


그때 손에 쥐었을 

볼펜 한 자루를 잊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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