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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Feb 21. 2021

수업일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1)


"뿡- 어제는 수업 중에
주민이가 방귀를 뀌었다."


애들 앞에 섰던 우정이는 웃음을 참으며 일기를 읽어 내려갔다. 나머지 애들은 키득키득 거리며 듣고 있었다. 7년 전, 수업 시간에 있었던 일이다.




열정이 넘쳤던 신규교사 시절, 읽었던 <중학교 국어수업 어떻게 할까?>라는 책에 나온 '수업일기'를 활용해 보기로 했다. 늘 재밌는 수업을 꿈꾸던 내게 ‘수업일기’라는 말 자체가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 책에서 저자는 '수업일기'를 이렇게 표현했다.


수업 일기를 쓰면 그날 배운 국어 수업 내용을 확인할 수 있으며, 다음 날 발표를 함으로써 학생들의 주의를 환기시킬 수 있다. 듣는 학생들은 전 시간에 무엇을 배웠는지 다시 알게 된다. 그리고 발표자의 표현력과 다른 학생들의 듣기 능력을 기를 수 있다.


너무 좋은 방법이었다. 매 수업이 시작할 때, 간단한 퀴즈로 지난 시간 내용을 확인하곤 했는데, 그걸 '학생'들이 직접 정리해보게 하는 것, 그리고 친구의 발표를 들으며 내용을 기억하는 것. 이거다 싶어 바로 시작해보기로 했다.


예쁜 노트 두 권을 사서, 중3 여학생 반에 슬쩍 운을 뗐다. 아이들은 '일기', '발표'라는 말을 듣고 완전 질색팔색 했다. 쌤, 요새 누가 일기 써요~, 완전 오글거려요~라며 강하게 거부했다. 하지만 나란 사람, 집요한 사람, 한 번 시작하면 일단 끝까지 해보는 사람. 또, 말발 하나는 썩 괜찮은 사람 아닌가!


너희 이제 중3이지? 중3이면 곧 고등학교 올라가네!? 특목고 가고 싶은 사람들은 면접 준비해야 하는데, 그러면 다른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는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데. 엥? 난 특목고 안 간다고? 얘들아. 생각해봐. 폰 바꾸고 싶어서 부모님 설득하려면 '말'을 어떻게 하느냐가 얼마나 중요해? 핵심만 딱! 조리 있게 딱! 그걸 수업 시간에 연습해 보는 거지! 어때!? 응!? 한다고! 오케이!


라고 우겨댔다. 투덜대는 아이들에겐 혼자서만 쓰고 발표하는 게 아니라, 반 친구들이 공평하게 다 한 번씩 하는 거니까 괜찮다고, 수행평가에 절대 들어가지 않는 거니까 편하게 해도 된다고 어르고 달래면서, 시작해보기로 했다. 솔직히 자의로 시작한 것이 아니었기에 ‘기억 안 남, 쓸 말 없음’만 있지 않을까 두렵기도 했지만, 아이들을 믿어보기로 했다.




그렇게 시작한 수업일기의 내용은 정말 다채로웠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반은 수업 내용을 잘 요약한 후에 수업에 대한 자신의 감상을 덧붙여 썼고, 활발하고 개구진 반은 수업내용보다는 그날 수업에 있었던 재밌는 에피소드를 썼다. 남학생반, 여학생반의 글도 분위기가 달랐다. 여학생들은 보통 있었던 일을 자세하게 쓰는 경우가 많고, 끝에 '쌤 사랑해요.'같은 애교가 있다면, 남학생들의 글은 아주 솔직하고 담백했다. '쓰기 싫지만 쌤이 쓰라해서 씁니다.'로 시작한 글은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 수업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로 끝나곤 했다.


일기를 발표하는 시간도 꽤 유쾌했다. 각 반의 분위기 메이커 같은 친구가 발표하면 같은 내용이라도 훨씬 재밌게 들렸고, 수업 분위기도 즐거워졌다. 관찰력 좋은 녀석들은 수업일기를 쓰기 위해, 수업을 듣지 않고 수업시간 친구들의 행동을 관찰하며 적기도 했다. ‘아무개는 수업 중 침을 흘렸다, 아무개는 수업 중 수학 문제를 푸는 것을 보았다’ 따위를 발표하며, '너네 내가 다 봤어.'라며 의기양양해하는 모습을 보면, 귀엽기까지 했다.


더군다나 수업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곤 했다. 45분 수업 중 5~10분 정도 일기 발표를 하고, 피드백을 하다보면 가뜩이나 지루하고 재미없는 국어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린 것이다. 5교시 체육 후, 6교시에 국어 수업을 해야 했던 반 아이들은 '수업일기'를 아주 아주 길게 적어오면서 (중학생이 노트 한 두 페이지에 일기를 가득 채워 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수업 시간을 보내려는 꼼수를 부리곤 했다. 그럴 땐 나도 슬쩍 눈감으면서 발표를 들어주었다. 나도 때론 수업하기 싫었으니 윈윈인 셈이었다.


그렇게 2013년부터 2015년까지 운영했던 수업일기는 대성공이었다. 아이들은 내 수업의 마스코트라고 생각했고, 나 역시 그 일기는 아이들이 참 좋아하는, 선생님과의 소통수단이라고 굳게 믿었다. 2017년, 새롭게 옮긴 학교에서도 수업일기 제도를 운영하면 이전 학교와는 또 다른 재미가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2017년 3월, 처음 만난 아이들에게 그간의 수업일기를 보여주며 영업(?)을 시작했다.


시작은 순조로웠다. 아이들에게는 (자기 차례가 돌아오지 않은 상태에서) 누군가의 발표를  듣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었고, 일기 덕분에 수업 분위기가 좋아진다는 긍정적인 반응도 줄을 이었다. “쌤 수업은 하나도 안 졸려요.”, “수업 일기가 있어서 수업이 되게 재밌고 기대돼요.”라는 말을 들으면 무척 뿌듯했다. 가끔은 이벤트성으로 내가 수업 들어가는 반에 대한 느낌을 일기로 적어 발표해주곤 했는데, 그런 날엔 아이들이 더 집중해 주었다. 진짜 꿈같은 수업 장면이었다. 당장에 교장 선생님이 들어와 수업 장학을 한다 해도 당당할 수업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흠뻑 취해, 소리없이 시작된 위기를 모르고 있었다.




“얘들아. 안녕!” 활기차게 수업을 들어갔는데 그날따라 반 애들 분위기가 어째 좋지 않았다. 가라앉은 분위기를 얼른 띄우고 재밌게 수업할 요량으로 일기 발표자를 찾았다. 오늘 진영이 순서네? 자~ 박수~~~! 하며 녀석을 보니 이미 얼굴이 벌게 있는 상태. 발표가 부끄러워 그렇구나, 누구나 처음은 있는 거라고, 쌤도 어릴 땐 발표가 죽도록 싫었다고, 반 아이들이 응원해줄 거라고, 멋있는 선생님인 척 설득을 했다. 그래도 반응이 없고 고개만 숙이는 녀석을 보니 안 되겠다 싶었다. 도대체 왜 그러니? 라며,  슬쩍 가 수업일기를 보니,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야말로, 백지.


어이없어하는 내 눈빛에 아이들 모두가 숨을 죽이고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었다. 쌤이 언제, 어떻게 화를 낼지 긴장하는 아이들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계산하고 있는 나의 대치가 시작되어 버렸다.


 2부에 계속 -



* 글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가명이며,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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