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녕 Nov 03. 2024

커피 메이커와 전동 그라인더

처음에 드립커피를 시작한다고 했을 때, 친구가 말했다.


“너, 전동 그라인더랑 커피 메이커는 꼭 사게 될걸?”

“핸드밀은 별로야?”

“핸드밀이 최고긴 한데, 하다 보면 손목 아파서 잘 안 하게 돼.”

“흠... 알겠어..”


라며 넘긴 지 벌써 8개월.

나름 잘 버텼다고 생각했는데 때가 된 것 같다. 가끔 커피를 마시고 싶어 원두를 갈다가 보면 힘이 꽤 든다. 아침에 출근 전에 마시려고 해도 귀찮고, 텀블러에 담아 갈 커피를 준비하는데도 핸드밀을 꺼내려고 하니 약간은 번거롭다. 엄청 귀찮냐?라고 하면 그 정도는 아닌데, 버튼 한 번에 위이이잉 갈린다면 그게 더 탐나는 쪽은 맞다.


갑자기 궁금해져 커피 메이커랑 전동 그라인더를 검색해 보니 가격대가 천차만별.

디자인도 그럴싸하면서도 기능이 좋은 것들을 찾아보다 보니 자꾸 가격이 올라간다. 적당한 선에서 타협해서 마음에 드는 것을 골랐다. 조만간 구입할 예정이다.


가만 보면 참, 사람이란 존재는 불편함을 견디지 못하는 것 같다. 핸드밀의 그 느림이 좋다고 하면서 또 일일이 손목에 힘줘가며 원두를 가는 것은 싫으니 말이다. 처음엔 괜찮던 것들도 귀찮아지고, 불편해지면서 자꾸 더 편한 것, 쉬운 것을 찾고 있는 듯한 느낌. 일상의 전반에 극도의 효율을 찾으며 삶의 양식 또한 바뀌어 가는 느낌이다.


예전엔 동네 슈퍼, 시장에 가서 일일이 내가 눈으로 고른 물건을 담아 오는 것이 당연했고,

지갑에 가득 든 지폐와 동전을 보며 얼마를 소비했는지 확인하는 게 당연했고,

내일 써야 하는 노트를 오늘 준비하지 못했다면 내일 선생님께 한 번 정도는 혼나는 게 당연했으며,

짜장면과 탕수육이 먹고 싶은 날엔 온 가족이 나가 집 근처 중화요릿집에 가서 먹고 오는 것이 당연했는데


지금은 우리가 조금씩 움직여야만 할 수 있었던 모든 것들이 클릭 한 번이면 대체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나? 물론 나는 그 세상의 변화에 아주 잘 편승하여 편리함을 누리며 살고 있고.

그런데 가끔은 과연 그게 맞나, 싶을 때가 있다.


가령 이번 달 카드값 명세서를 보며

도대체 저 수많은 숫자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썼는지를 가늠할 수 없을 때나,

새벽 배송이 되지 않는다고 짜증 내는 나를 발견할 때나(새벽 배송은 원래 ‘당연한’것은 아니니까)

배달이 느리다며 신경질적으로 어플을 확인하는 나를 발견할 때,

불현듯 내 모습이 싫어지면서 삶을 반추해 본다.


어쩌면 우리는 조금씩 불편하게 살아가는 게 당연하다는 것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 편리는 누군가의 불편함으로, 누군가의 성실함으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배달 어플, 쿠팡 어플 하나 시원시원하게 지우지 못하는 내가 아쉽다.


여하튼, 나는 조만간 커피 메이커를 사고 전동 그라인더를 살 것이다.

그로 인해 얻은 시간 동안 조금 더 의미 있는 글쓰기와 책 읽기와 수업 준비와 육아를 하겠다고 다짐하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