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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Mar 21. 2021

친정 엄마가 보낸 택배 상자에는

고향의 맛 세 봉지가

[울 딸 오늘 얼집에서 놀이용 김 먹었대ㅋㅋ]

[뭐? ㅋㅋ]


적응기간이라 점심 먹고 하원 할 시간. 잘하고 있나, 하원은 했나, 궁금해서 일에 집중이 안 되는데 남편에게 카톡이 왔다. 응? 뭘 먹었다고?

 

하원 시키러 간 남편에게 선생님이 웃으며 말씀하셨단다.


“적응도 너무 잘하고, 밥도 잘 먹어요. 그리고 오늘은 놀이용 김까지 먹었어요! (웃음)”


그날 저녁, 키즈노트에 올라온 사진 보니 볼수록 웃긴다. 입술 근처에 붙어있는 까만 김 조각. 구멍 뚫린 김에 자기 눈을 맞추며 배트맨 놀이하는 사진 너머 선생님이 귀여워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딸은 엄마를 닮는다더니, 뭘 그런 거까지 닮니.




편식쟁이였던 나는 다른 집에 가면 쉽사리 밥을 잘 먹지 못했다. 비릿하거나, 냄새가 나거나, 너무 매운 반찬들을 먹기 싫어 결국 흰 밥만 꾸역꾸역 먹고 있으면 넌 왜 아무것도 안 먹냐는 핀잔을 듣는 게 싫어 늘 밥 먹는 시간이 두려웠다. 그때마다 어디든 꼭 있는 ‘김’은 나를 구원해주었다. 김 몇 장에 밥 듬뿍 싸서 꿀떡꿀떡 넘기면 내 몫의 식사를 다 한 셈이라 맘 편이 상을 벗어날 수 있었다.


때문에 엄마는 항상 집에 김을 쟁여두었고, 늘 까탈스러운 나를 위해 밥상엔 꼭 김을 올려주었다. 가끔은 흰색 접시에 네모난 김을 소복이 쌓고 이쑤시개로 푹 찔러 움직이지 않게 고정해주면, 하나 집어 갓 지은 흰쌀밥에 둘둘 말아 입에 쏙 넣었다. 까맣고 네모난 모양에 짭짤한 소금과 고소한 참기름(혹은 들기름)이 곁들여지면, 밥의 달달함과 잘 어우러지는 그 맛이 참 좋았다.


딸 역시 유아식을 시작하면서부터 김은 제일 좋아하는 반찬이었다. 두 손 죔죔 하면 주먹밥을 싸 달라는 건데, 다른 건 넣지 않고 흰 밥에 김만 싸준 김밥을 꿀떡꿀떡 잘도 먹었다. 특히 유아용 김은 고급 재료를 쓰는지 더 고소해, 짭짤함은 덜하지만 맛있어서 애 앞에서 밥을 싸주면서 몇 개는 내가 홀랑 홀랑 먹어버렸다. 아니, 애들 김은 냄새도 좋아? 라며. 옆에서 눈독 들이는 남편에게 슬쩍 한 장씩 주면서. 솔직히 딸은 당근, 계란, 시금치, 소고기에 치즈까지 넣은 김밥보다도 그냥 김에 밥만 싸준 김밥을 훠어어어얼씬 좋아한다. 김에 싼 밥은 다 먹지만, 김밥은 몇 개 먹고 꼭 남기니까 요리 못하는 엄마에게는 최고의 딸인셈.


그래서 가끔(아니 사실 자주) 반찬 하기 귀찮은 날엔 부러 먼저 제안을 한다. “딸~ 엄마가 주먹밥 싸줄까?”라고. 그러면 딸은 신이 나서 죔 죔 하며 다가온다. 좋다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덕분에 대형몰이나 시댁, 친정에 갈 때에도 꼭 김을 세봉 정도 챙겨간다. 다른 준비물 없이 밥과 김만 챙겨도 아이의 한 끼가 해결이 되니 정말 간편하다. 시판 김이면 브랜드 상관없이 잘 먹으니 부담도 없고, 어딜 가든 볼 수 있는 재료인 데다가, 이젠 어른용 김을 사서 먹이니 값싸고 편하고, 정말 좋다.


하지만 난, 딸과 다르게 김에 관해선 아주 깐깐한 편이다. 다른 음식은 그냥저냥 먹지만 김만큼은 까다롭게 고르고 골라 먹는다. 너무 싱겁거나, 너무 짜거나, 너무 새로운 맛이 느껴지면 한 번 먹고 손에 대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대형마트보단 동네 슈퍼가 더 가까웠고, 슈퍼 보단 동네 시장을 더 좋아했던 엄마는 한 번도 시판용 김을 사서 먹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가 좋아하는 김은, 내 인생의 90% 이상을 채웠던 김은 대기업의 김이 아니라 집 앞 5일장에서 사 온 5,000원에 세 봉지를 주는, 김이었던 것이다.


철판에 김을 바싹 구워 들기름을 슥슥 바르고, 소금을 뿌린 김. 투명한 비닐에 툭툭 담아 파는 그 김. 장날이면 주인장 내외가 일찍부터 고소한 냄새를 시장 가득 뿌려대던 그 김. 그 김만이 내 입에 꼭 맞는, 100점짜리 김이다.




 "너 김은 필요 없냐. 엄마가 김 보내줄까?"


임신할 때, 그 김이 먹고 싶었다. 동네에 시장도 없고, 마트에서 파는 김은 성에 안차 고민하고 있는데 내 마음을 귀신 같이 안 엄마가 김을 보내왔다. 택배 상자 속, 검은 비닐봉지 안에 담긴 김 세 봉지를 보니 있던 입덧도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아이를 낳고 나서도, 육아휴직 중에 밥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해 위경련이 올 때도, 울 엄마는 슬쩍 내게 물었다. 그렇게 받아먹은 김이 벌써 수십 봉은 된다.


한 번은 매번 김을 택배로 보내는 장모님께 죄송했던 남편이 동네에서 비슷한 김을 본 것 같다며, 그걸 사보자고 제안한 적이 있다. 사실 죄송한 마음이 컸던 차에, 설렘을 안고 동네 시장에 가보았다. 겨우 겨우 찾은 김 가게에서 발견한 김은, 너무 부실했다. 적은 양도 양이거니와, 비쌌다. 게다가 주인아저씨는 오로지 현금만을 원하며, 손사래를 쳤다. 마음이 상했다. 며칠 후, 김 좀 보내줄까? 라며 묻는 엄마에게 냉큼 대답했다. 응. 보내줘. 아주 많이.


도착한 택배 상자 속, 검은 비닐봉지 안, 김을 한 봉 뜯어 용기에 차곡차곡 담는다.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함께 날아온 그리운 친정 냄새를 맡아본다. 봉지에 남은 김 부스러기를 손가락으로 톡톡 찍어먹으며 생각한다. 그래, 이 맛이야.


옆에서 보던 딸도 한 장 먹겠다고 손을 내민다. 웃으며 말한다. 응, 아직 이건 안 돼~ 이건 너무 짜거든. 시무룩한 표정으로 다시 한번 손을 내민다. 그래도 이건 안 돼. 어른 거야. 나중에 좀 더 크면 줄게. (사실, 이건 엄마가 아껴먹을 거거든.)


지금이야 겨우 28개월 된 딸에게 먹이긴 너무 짜서, 사실은 내가 먹기에도 양이 적어서, 주지 못하지만 언젠간 딸에게도 이 맛을 알려 주고 싶다. 네가 여태까지 먹었던 김이랑 차원이 다른, 정말 제대로 된 김이 여기 있다면서. 엄마가 어려서부터 즐겨먹었던, 네가 뱃속에 있을 때도 같이 먹었던, 그래서 먹으면 행복해지는 힐링푸드가 여기 있다고.




인생 처음 진짜 짭짤하고 고소한, 아주 자극적인 김을 맛본 딸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실실 웃으며, 슬쩍, 손을 내밀어 김을 한 장 더 가져갈까? 그럼 모르는 척 한 장 더 줘야지. 그리고 아주 오래오래 둘이서 나눠먹어야지. 너 한 장, 엄마 한 장. 너 한 장, 아빠 한 장 하면서. 나중에 딸이 내 나이가 되어서 이 김을 찾으면, 그때 나도 엄마처럼 바리바리 싸서 보내줘야지. 어릴 적 함께 먹던 그 맛, 추억의 맛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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