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 일기
백수가 되어서 좋은 점 중 하나는 마음 내키는 시간에, 내가 좋아하는 메뉴로, 여유롭게 점심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거의 대부분은 집에서 해결하는 편인데, 가끔씩은 냉장고에 남는 자투리 식재료를 활용하여 다소 실험적인 점심을 만들어 먹기도 한다. 맛은 보통 슴슴하다거나 아니면 아주 과감하다거나... 뭐 사람이 아예 못 먹을 정도는 아니다.
또 오늘 너무 좋은 일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엄마가 전화로 노래를 불러주신 것이다. 회사에 다닐 때는 엄마가 전화하면, "엄마, 나 지금 바쁜데... 급한 일이야?" 늘 이런 식으로 급하게 전화를 끊었었다.
오늘은 엄마가 전화를 해서 "내가 '들장미' 노래랑 '백합화'라는 가곡이 듣고 싶은데, 카톡으로 영상을 보내줄 수 있니?"라고 물으셨다. 지난번에는 냇 킹 콜( Nat King Cole) 노래를 듣고 싶어 하셔서 보내드렸었는데, 우리 엄마의 음악 취향은 꽤나 고급스럽다. 카톡으로 유튜브 영상을 보내드리니 엄마가 너무 좋다면서 다시 전화를 주셨다. 엄마가 노래를 흥얼거리실래 "엄마, 노래 불러주세요~"라고 부탁드렸다. 오늘은 엄마에게 노래를 들어줄 청중이 필요한 날 같았다. 엄마의 작은 기쁨을 함께 나눌 친구가 필요한 날 말이다. 누구나 그런 날이 있지 않나? 나를 알아주었으면 하는 날.
엄마는 너무 기뻐하시면서 목을 가다듬고 노래를 불러 주셨다. 나는 엄마 몰래 통화녹음 버튼을 눌렀다. 마침 커피를 마시러 나가는 길이어서 이어폰을 끼고 흰 눈이 쌓인 거리를 천천히 걸으며 엄마의 노래를 들었다. 낭만적인 겨울 거리에 나 혼자 인 듯, 특별한 경험을 엄마와 단 둘이 공유하는 듯, 엄마의 노랫소리에 취해 나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한 곡 더 불러줘요. 엄마" 나는 앙코르를 청했다. 엄마는 무려 네 곡이나 신나게 부르셨다.
"오후에는 살살 나가 동네도 걷고 한의원도 다녀와야지~ " 엄마가 전화를 끊으며 기분 좋게 말씀하셨다.
"엄마 다음에도 또 전화해서 노래 불러줘요~"
한가해지니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기게 된다. 가끔은 내가 뒤처지는 듯, 잊히는 듯, 불안하고 답답한 마음이 밀려오기도 하지만...
지금 가지고 있는 여유들을 주변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기쁨이 생겨난 것도 맞다. 두 개를 다 가질 수는 없다. 지금 내 두 손에 쥐어진, 당장의 가진 것을 소중하게 여기며 감사해야겠다. 그렇게 연말을 보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