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by 다정한 포비

지난 연말에 새해 목표로 피아노를 일주일에 세 번 이상 치겠다고 다짐을 했었다. 1월에는 전혀 지키지 못했지만, 오늘 드디어 백만 년 만에 안방 구석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전자 피아노의 뚜껑을 열어 보았다. 낮은음 쪽 솔 건반은 문제가 있는지 소리가 나다 안 나다 했다. 오랜만에 쳐보니 어색한 손가락도 조금 아프게 느껴졌다.

피아노는 언제나 나의 로망이자 환상이었다. 아마 그 시작은 초등학교 때 보았던 텔레비전 외화 시리즈 '케빈은 열두 살'에서 여자친구 위니가 연주했던 '파헬벨의 캐논 변주곡'을 듣고 나서부터였던 것 같다. '언젠가 나도 저 아름다운 피아곡을 꼭 직접 쳐보고 말 거야...'라고 말이다.


그 꿈을 이루려 초등학교 때 배우지 못한 피아노를, 서른 살에 아기 낳고 한 번 배우고(신종플루가 유행해서 바로 그만두어야 했지만), 2015년에 미국에 머물면서 한국인 선생님께 한 번 배우고, 2020년 즈음에는 회사를 다니면서 퇴근 후에 배웠었다. 하지만 실력은 쉽게 늘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날은 피아노 학원 레슨을 끝내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편의점에 들러 맥주를 사서 피아노 가방에 담으면서 분풀이를 하기도 했다.(피아노 책이 담긴 공부하는 신성한 가방에 술을 담는 나름 나만의 앙큼한 복수였다. 물론 그러고 맥주도 다 마셨다.)

악보를 읽는 나의 뇌는 너무너무 느려터져서(정말 내 머리가 나쁜 건 아닌지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계기였다) 손은 건반 위에서 자꾸 멈칫멈칫했다. 삑사리는 기본이었다.


피아노 레슨에 관한 아픈 추억도 하나 있다. 미국에 머물면서 아이와 함께 배울 생각으로 짱짱한 소리가 매력적인 중고 피아노를 하나 장만했다. 그리고 근처에 사는 50대 초반의 여자선생님께 피아노 레슨을 받았다. 나는 피아노의 기초조차 없었지만, 선생님께서는 성인이라는 점을 감안해서 재미있게 배울 수 있도록 바로 연주곡 악보로 레슨을 해주셨다. 하지만 악보 보는 것조차 초보였던 나는, 악보를 머릿속으로 해석하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악보를 읽는데 음표들이 자꾸 머릿속에서 버퍼링이 나서 손가락이 따라가지를 못했다. 악보를 익숙하게 머릿속에서 읽는 연습이 먼저 필요했던 것이다. 안 그래도 나는 입력된 이미지를 하나하나 새겨서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 느리게 필요한 사람인데, 무작정 피아노 치기부터 시작했으니 당연히 초반 과정이 순탄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곡은 편법으로 악보에 손가락 숫자를 일일이 그려서 숫자를 보고 치기도 했다. 어릴 때 피아노를 배우는 것이 얼마나 큰 혜택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된 경험이었다.

그러던 중에 한국에 계신 시어머니가 미국에 머물고 있는 우리 집에 방문하셨다. 그날은 평소처럼 피아노 레슨을 가는 날이었는데, 어머니를 혼자 집에 계시게 할 수 없어서 어머니를 모시고 아이와 함께 레슨을 받으러 선생님 댁으로 갔다. 어머니는 피아노가 있는 거실 뒤쪽 소파에 앉아 기다려 주셨다. 그런데 어머니가 오셔서 그 주에는 연습을 많이 못했던 탓인지 그날따라 나는 유난히 더 많이 틀리고 말았다. 게다가 어머니 앞에서 자꾸 틀려서 부끄러운 내 속도 모르시고, 선생님은 이상하게 신경질적으로 여러 번 나를 다그치셨다.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진땀이 나는 레슨을 마치고, 소파에 앉아 계신 어머니를 돌아보니 어머니 표정이 어두우셨다.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지만 며느리가 피아노도 잘 못 치고 선생님께 계속 혼이 나서 무척 속이 상하셨던 것 같았다. 나 역시도 멋지게 피아노 치는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해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어머니와 나는 그날 일에 대하여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도, 나중에도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나는 속상하셨을 어머니의 마음이 생각나서 생각날 때마다 함께 속상해졌다.

한국에 와서는 좀 더 체계적으로 학원을 다니면서 배워서 체르니까지 치게 되었지만, 시간 부족을 핑계로 정말 피아노를 그만두게 되었다. 평소 선생님께서 나에게 바라는 기대치만큼 못 치는 게 죄송하고 속상했던 때라 그만두는 것이 섭섭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시원했다. 그리고 피아노에 재능이 없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손을 놓았다. 그 이후로 약 4년간 피아노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것 같다.


그런 내가 백수가 되어서 오늘 처음 피아노 뚜껑을 다시 열게 된 것이다. 그래봤자 바이엘 4권부터 다시 시작이지만... 앞으로 매일매일 조금씩 쳐보려고 한다. 이번이 네 번째 도전, 과연 꾸준히 나아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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