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인을 만난 날, 판이 바뀌었다

끈은 사라졌지만 관계는 남았다

by ANNA

두근두근 긴장을 안고 시작된 인솔자로서의 첫 패키지 투어였다.

어찌어찌 손님들과의 첫 미팅을 끝내고, 이미 반쯤 혼이 빠진 채 정신줄을 붙잡으며 게이트에 도착했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는데, 눈치껏 손님들을 다시 한번 훑어보고 전원 안전하게 게이트에 도착했는지 확인해야 했다.

그런데 게이트 근처를 몇 바퀴나 돌며 둘러봐도 어떤 분이 내 손님인지 도무지 매칭이 되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분명 명단과 얼굴을 함께 확인했건만, 머릿속 하드디스크는 포맷이라도 된 듯 텅 비어 있었다.

약간의 안면인식장애 옵션을 탑재하고 있는 나에게 뽀글이 아주머니들은 단체로 복사 붙여 넣기 한 듯 보였고, 살짝 벗겨진 머리에 배 나온 아저씨들은 공항에 ‘아저씨 기본형’이 대량 납품된 것처럼 보였다.

저분이 우리 팀인가 싶어 인사드리면 전혀 다른 항공사 탑승객이고, 또 저분인가 싶으면 이미 다른 인솔자가 데려가는 손님이었다.

그야말로 현실판 ‘숨은 내 손님 찾기’였다.


지금 같았으면 다르다.

게이트 앞에서 반드시 나에게 얼굴 도장 찍고 가시라고 몇 번이고 당부했을 것이고, 보이지 않으면 바로 전화를 돌려 위치를 확인했을 것이다.

경험치가 쌓이니 사람을 구분하는 눈도, 상황을 수습하는 잔기술도 생겼던 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회사에서 하루 교육받은 내용이 전부인 신입 인솔자였다.

교과서에 적힌 정석만이 답이라고 믿었고, 그 외의 행동은 괜히 규정을 어기는 일처럼 느껴졌다.

융통성은 없고 책임감만 과하게 충만한, 말 그대로 ‘매뉴얼 인간’.

그래서 발은 공항을 바쁘게 돌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이미 비상벨이 울리고 있었다.





보딩이 시작되고 나서야 나는 다시 상황을 살펴보니 줄을 서 있는 손님들 옆으로 그들을 체크하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여유롭게 손님들과 눈인사를 나누는 사람,

서류와 볼펜을 들고 한 명 한 명 확인하는 사람.

누가 봐도 인솔자였다.


왠지 나도 저래야 할 것 같아서 엉거주춤 보딩 라인 옆에 서서 인솔자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괜히 미소를 띠며 줄 선 사람들이 모두 내 손님인양 눈인사를 하기도 하고, 명단도 한 번 더 들춰봤다가,

아무 일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보딩 라인을 지켜봤다.

속은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데 겉은 베테랑 인솔자인양 여유로운 척을 했다.


손님들 줄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 되어서야 다른 인솔자들도 슬슬 탑승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나도 자연스럽게 움직이면 되겠구나, 하고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그때였다.

한 중년의 아저씨가 지나가다 나를 보며 툭 한마디를 던졌다.
요즘 뜸하더니, 오랜만이네요.

그럴 리가 없다.
나는 이 투어가 첫 투어인데..


아직 보딩 중인 손님들도 있는 데다, 그분은 분명히 아는 사람은 내가 아닌데, 그렇다고 여기서 “저 오늘 처음입니다”라고 밝힐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초짜 티는 절대 내면 안 된다는 매뉴얼이 다시 떠오르며 결국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애매하기 짝이 없는 한마디.

아닐걸요.

부정도 긍정도 아닌, 공중에 붕 떠버린 말.

스스로 생각해도 정체불명의 답을 남기고 황급히 사라졌다.




카타르 도하의 하마드공항에 도착하니 수많은 인솔자들이 각자의 표식이 담긴 깃발과 피켓을 들고 서 있었다. 그분의 피켓에는 '동유럽 발칸투어'라는 단어가 또렷하게 적혀 있었다.

동유럽 발칸투어’.

인솔자의 최고봉이라 불리는 코스 아닌가.

이미 내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경지에 오른 사람처럼 보였다.


내가 전광판을 올려다보며 다음 항공편 게이트를 확인하고 있는 사이, 그분은 스치듯 다가와 “여기 화장실보다 다음 구역 화장실이 훨씬 크고 쓰기 좋아요”라며 무심한 듯 툭 정보를 남겼다.

마치 고수는 디테일까지 다르다는 듯.


그리고 나는 바르셀로나로,
그분은 동유럽으로..

각자의 방향으로 총총 걸어갔다.




그분과 다시 만난 건, 내가 첫 투어를 무사히 마치고 바르셀로나-도하를 거쳐 도하-인천행 비행기에 올랐을 때였다.

첫 투어를 끝냈다는 뿌듯함과 며칠 내내 조여 있던 긴장이 한꺼번에 풀린 상태에서 그분을 다시 마주하니, 낯선 공항 한가운데서 아는 사람을 만난 것처럼, 아니 귀인을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나는 가운데 열에, 그분은 오른쪽 창가 쪽 비상구석 앞자리에 앉았다.

그 당시만 해도 인솔자들은 대부분 비상구석을 배정받던 시절이었다.


이런 장거리 비행을 고수는 어떻게 버티나 싶어 곁눈질로 슬쩍슬쩍 지켜봤는데, 그야말로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일단 자리에 앉자마자 신속하게 잠옷 비스무리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기내에서 저게 가능하다고?

그것부터 내겐 매직이었다.

그리고 넓은 비상구석 앞 공간에 무릎 높이의 가방을 척 놓고, 그 위에 다리를 자연스럽게 걸쳐 올린다.

이미 이코노미가 아닌, ‘나만의 작은 비즈니스 클래스’를 완성해 버린 느낌이었다.

거기다 쉬지 않고 승무원을 호출해 마실 것을 주문한다. 맥주.. 맥주, 또 다른 무언가.

기내 서비스를 능숙하게 활용하는 모습이 기내 이용에 관해서는 신의 경지에 오른듯했다.


병아리 인솔자였던 나는 그저 배우고 싶었기에 용기를 내어 다가갔다.

“첫날은 제가 너무 당황해서 제대로 인사를 못 드렸어요.

그때 말씀하신 분이 제가 아닌 것이 저는 이번 투어가 처음이거든요.”

그리고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대 선배님 같으신데 한 수 가르쳐주실 수 있으실까요?”


그때부터였다.

그분 입에서 쏟아져 나온 인솔자 업의 세계는, 내가 소속 사무실에서 배웠던 교과서적 지침을 훌쩍 넘어서는 이야기들이었다.

관광학과를 졸업하고, 88 올림픽 이후 해외여행 자유화 시대를 거치며 30년을 인솔자로 살아온 사람의 언어는 확실히 달랐다.

매뉴얼이 아니라 경험이었고, 규정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는 몇 시간을 입을 헤 벌린 채 정신없이 들었다. 비행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를 만큼.


그렇게 시작된 인연이었다.

그분이 가르쳐준 지침 중 일부는 지금도 그대로 활용하고 있고, 일부는 내 방식대로 변형됐고, 어떤 것은 솔직히 아직도 어렵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여행업계에 연고 하나 없던 나에게, 그분은 처음이자 유일한 ‘끈’이었기 때문이다.

내 인솔 인생은, 어쩌면 그 비행기 안에서 진짜로 출발했는지도 모른다.





그날 비행기 안에서 그분이 해주신 말은 지금도 또렷하다.


첫 만남이었던 인천-도하 구간에서도 우리는 같은 비상구석에 앉았었다고 했다.

그때 나는 한순간도 쉬지 않고 일정표를 들여다보며 공부하고, 외우고, 또 외우고 있었고, 역사책을 전자책으로 받아와 탐독하고 있었다.

그걸 매의 눈으로 다 보고 있었다는 듯,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넌 뭘 해도 잘 될 거야.”

그리고 덧붙였다.
“지금은 힘들어도 딱 1년만 스페인 투어를 미친 듯이 해봐. 기본기만 제대로 쌓이면, 내가 서유럽이든 동유럽이든 어디든 보내줄게.”

그 말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인정받았다는 기쁨보다, 누군가가 나를 ‘가능성 있는 인솔자’로 봐줬다는 사실이 눈물 나도록 벅찼다.


나는 정말 1년을 미친 듯이 했다.

몸이 남아나질 않을 만큼 스페인을 돌았다.

그런데 하필 그 끝에 코로나가 왔다. 세상이 멈춰버렸다.


그래도 그분은 약속을 지켰다. 인솔 경력 20년 이상만 가능하다는 동유럽·발칸 투어에 나를 추천했다.

“아직 이르지 않나”라는 반신반의와 우려를, 나는 결과로 눌렀다.

투어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고, 그분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해 냈다.


동유럽·발칸 인솔을 기점으로 제의가 쏟아졌다.

지역도, 형태도 다양했다.

나는 그 흐름을 타고 전 세계를 인솔했고, 패키지·세미패키지·크루즈·트레킹, 할 수 있는 건 거의 다 경험했다.

그리고 그 경험이 쌓여 지금의 여행사를 만들 수 있었다.


그분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아직도 일비에 맞춰 움직이는 인솔자로 남아 있었을지도, 아니면 죽도록 고생하는 스페인 스루 가이드로 버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다르다. 선택지가 생겼다. 예전 같으면 무조건 잡았을 스페인 스루 일정도, 이제는 웃으며 고를 수 있고 필요하면 거절할 수도 있다.


결국 한 사람의 말 한마디가, 내 인솔 인생의 판을 바꿨다.





역시 유능하고 이름난 인솔자였던 그분의 후배를 따로 만난 적이 있다.

나와 이야기를 몇 마디 나눠보더니 한마디를 했다.

“W선배님은 서비스로 승부하는 스타일이고, 우리는 가이드로 승부해야 해요. 안나씨는 딱 가이드 스타일이에요.”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인솔자 스타일에는 정답이 없다는 걸 그때 처음 실감했다.

누군가는 사람을 감동시키고, 누군가는 설명으로 설득한다.

방식은 달라도 무대는 같다.


W선배님의 ‘서비스 스타일’ 중 내가 아직도 죽어도 흉내 내지 못하는 게 있다.

첫 투어 이후 다시 통화했을 때, 그분은 자신의 인솔 스타일을 사진 한 장으로 보내왔다.

캐리어를 가득 채운 라면, 짜파게티, 비빔면, 그리고 송송 썬 파와 김가루까지. 진심으로 서비스를 하겠다는 장비였다.


“진상이 있을수록 더 잘해야 해. 유독 까다로운 분 있으면 라면 하나 끓여서 그 방에 갖다 줘. 그리고 이렇게 말해.
‘식사 잘 못하시는 것 같아서 제가 준비했어요. 맛있게 드세요.’
그리고 꼭 덧붙여.
이거 선생님만 드리는 거예요.’”


그리고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짜파게티랑 비빔면에 올릴 오이랑 계란은 그날 조식 식당에서 쎄벼와”


몇 번 따라 해 봤다.

대부분은 고마워했지만 나는 안다.

그건 기술이 아니라 체질의 문제라는 걸.

나는 아무리 해도 그분만큼 자연스럽지 않다.


그뿐만이 아니다. 말도 안 되는 진상을 만나 속이 문드러질 때, 펑펑 울며 하소연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사람도 그분이었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던 한마디.

“그년 내가 죽여버린다.”

물론 실행은 안 되는 위로라는 건 알지만 그 말 한마디가 그렇게 통쾌하고 위로가 될 수가 없었다.

누군가 내 편이 되어준다는 건, 인솔자에게 생각보다 큰 힘이다.


여행업은 결국 끈이고 줄이다.

대부분은 여행사에 취업해 실무를 쌓거나, 인솔자와 가이드로 오랜 경험을 쌓은 뒤 창업한다.

그게 일반적인 루트다.


여행업계의 햇병아리였던 내가 여행사를 차릴 수 있었던 건, 내 능력 때문이라기보다는 첫 투어에서 귀인을 만났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하다.

그리고 그분을 통해 다양한 현장을 경험해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무게를 감당할 만큼은 되었으니 이제 더 이상 끈은 필요 없다.

하지만 한국에 있는 어렵게 날을 잡아 술잔을 기울이며 각자의 애환을 털어놓고 위로하는 동지가 되었고

좋은 게 있으면 나눠 먹고, 그 집 강아지 장례까지 참석할 정도로 동료애를 넘어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친분으로 남은 관계가 되었다.


글을 쓰는 와중에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어딘가를 또 누비고 계실 그 선배님께 전화 한 통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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