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생활인 2
중학생에게 니하오를 듣고 분개한 다음 날, 더치 친구를 만났다. 그에게 내가 겪은 일을 설명하고 니하오가 왜 엿같은지를 조목조목 설명했다. 근데 또 당하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모르겠네. 네덜란드인을 비하하는 단어를 알게 되었는데 그런 말로 반격하고 싶지는 않거든. 더러운 말을 들었다고 내 입을 더럽히기 싫으니까. 그 친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숙고하더니 친구는 제안했다. 니하오를 듣더라도 너는 여기 말로 인사해 보는 건 어때? Hallo, Goededag라고 말이야. 듣고 보니 너무 우아한 대응이 아닌가. 환대하는 거절의 말. 간접적이면서 확실한 말. 어떻게 네덜란드 말로 저주를 퍼부을까 골몰했는데. 역시 좋은 친구는 나를 고양시킨다.
평소처럼 저녁에 두 아이와 니하오를 당했던 공원에 갔다. 같이 공원 몇 바퀴 뛰고, 철봉에서 노는 아이들을 보며 나도 설렁설렁 운동했다. 맨발로 봉 타고 올라가고, 높은 곳에서도 겁 없이 회전하는 아이들을 보면 아찔하지만 자신 있어서 하겠거니 한다. 말려도 할 테지. 말려서 제 몸 다룰 기회를 뺏을 수도 있고. 그러니 내 역할은 아이들의 재주를 잘 보고 실감나게 놀라는 것이다. 내가 호들갑을 떨면 큰 애는 씰룩거리는 입에서 자기 만족감이 새나온다. 반면 작은 애는 자기 멋있지 않냐 물으며 내 반응을 더 바란다. 큰 애는 '나만 알기 아까운 내 멋을 이제야 엄마가 아네' 하는 것 같고 작은 애는 '엄마가 봐야만 내 멋이 멋이 돼' 하는 것 같다. 나이와 성정이 반영된 반응이다.
공원에 어째 자전거 탄 애들이 많다. 초등학교 3학년부터 중학생쯤 됐을까. 열댓 명의 아이들이 스쿠터 또는 스쿠터형 전기자전거를 둘 씩 타고 공원을 휘젓고 다닌다. 나한테 니하오 했던 애가 얘네 중 하나일 수도 있겠다 싶은데 기억이 잘 안 난다. 또 당하면 어쩌나 마음이 움츠러들지만 당하기 전까지 당한 게 아니라고 마음을 풀어본다. 작은 애가 운동기구 쪽으로 가서 따라간다. 소년소녀들이 몰려있다. 가까이 가니 초딩 소년 1이 니하오 한다. 당해버렸네. 내가 고개를 도리도리 하며 '좋은 저녁(Goedeavond)'이라고 인사했다. 소년 1이 왜 니하오가 안되나고 물었다. 나는 너는 왜 니하오를 하냐고 물었다. 여기는 중국이 아니고 네덜란드잖아. 그러자 퉁퉁한 소녀가 니하오가 무슨 뜻인지 아냐고 물었다. 모른다고 했더니 반가운 인사라고 했다.
이때부터 네덜란드어를 정확히 알아듣기 힘들었다. 내가 떠듬대고 영어를 쓰자 퉁퉁이는 나한테 화를 낸다. '영어 말고 네덜란드어로 말해. 여긴 네덜란드잖아.' 옆에 다른 소녀 2는 영어로 말해보라고 한다. 나는 내 얼굴 때문에 니하오라 하는 게 싫고, 네덜란드어로 인사를 하거나 그냥 지나쳤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이들은 시끌시끌하다. 미안하다고 하라는 아이, 아무것도 안 하고도 미안하다는 아이, 미안하다고 할까 말까 눈치 보는 소년 1. 목소리가 큰 퉁퉁이는 이렇게 말했다. '네덜란드는 자유의 나라야. 니하오를 하든 말든 자유라고. 그리고 니하오는 인사인데 왜 기분이 나쁘지?' 그리고 스쿠터를 타고 멀리 갔다 돌아왔다를 반복했다. 대화를 거부당한 나는 수세에 몰렸고, 사과를 망설이던 소년 1은 의기양양해졌다. 소년 셋이 내 앞에 일렬로 서서 합장을 하며 니하오를 했다. 영어는 쓰지 말고, 네덜란드어만 쓰라는데 니하오는 또 들어야 한다.
언젠가 이런 일을 겪지 않을까 상상한 적이 있었다. 내 반응이 궁금했다. 악다구니를 쓸까. 사람을 패진 않을까. 부들부들 떨며 울진 않을까. 격한 감정만 상상했는데 의외로 차분했다. 저 아이들이 왜 저런지 이해가 갔다. 나와 확연히 다른 어른이 우리에게 진다. 저 어른이 니하오를 싫어하지만 우리는 그래도 된다. 혐오는 자유니까. 여기는 우리 땅이니까. 우리는 저 어른을 까내리는 놀이를 하고 있어. 니하오를 외치면 나는 우리 안에 확실히 머물 수 있을 거야. 재밌기도 하네, 내 한 마디에 얼굴이 굳어버리는 어른이라니.
퉁퉁이는 내 말을 들을 의지가 없었고 나도 더 할 수 있는 게 없단 걸 알았다. 내 자전거로 돌아오는데 스쿠터에 탄 아이들이 니하오를 하거나 미안하다며 지나쳤다. 그래 미안하다는 애가 있는 게 어디냐. 니하오도 잦아들 날 오겠지. 똥을 묻혀봐야 똥인 줄 아는 애도 있지 않나. 나중에라도 똥인 줄 알면 다행일 텐데. 그래도 난 분명히 말렸단다. 이건 내 힘을 도약하는 철봉이 아니야. 남을 괄시해 스스로 추해지는 거라고. 그래도 하겠다면 별 수 없지만. 부디 언젠가 알길 바래. 너 자신을 위해서.
내 아이들은 쟤네들 나쁘다고 했다. 맞아. 그래도 다 그런 건 아니야. 우리랑 친한 네덜란드 어른들은 우리를 소중히 대해주잖아. 쌜쭉했던 큰 애가 갑자기 비실비실 웃는다. 니하오랑 미야우(고양이 울음소리)랑 비슷하다! 긴장이 풀리면서 와하하 웃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