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푸른 Sep 22. 2023

뒷담을 들었다면 유감입니다.

네덜란드 회사생활 3


우리 프로젝트 리드(PL), 안이 떠난다. 더 잘나가는 프로젝트로.


난데없이 윗선에서 가라고 했단다. 왜 가야 하냐고 물었지만 뭐 그렇게 됐다는 뻔한 대답이 돌아왔다고. 이 발표를 하는데 아쉬워 보였다. PL로 처음 맡은 프로젝트이고, 동료들 사이가 좋아서 떠나기 서운하다고. 얼마간의 침묵 후에 동료들은 하나 둘 축하한다고 했다. 발탁되어 떠나는 거니까. 안의 상사인 쿤이 나서서 덕담한다. 좋은 기회를 만난 걸 축하하고 이제껏 열심히 일해주어 고맙다고.


안은 작년 3월, 내가 입사하고 얼마 안 있어 PL 자리로 승진했다. 나이는 서른, 여자 친구와 사는 여자다. 175cm 정도 키에 덩치가 좋고 듬직하다. PL은 수많은 역할의 사람들을 만나고, 일정에 따라오도록 직원들을 독려하면서, 각자에게 부족한 부분이 없는지 세심히 살펴야 한다. 그 일을 얼마나 잘하던지. 한 사람 한 사람 다정하게 대하는 건 물론이고 대화가 산으로 갈 때 요점을 짚어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한 번은 회의에서 한 40대 남자가 50대 남자 동료를 몰아붙인 적이 있는데 서른 살의 안이 큰 소리로 말렸다. 그녀의 카리스마에 소란이 잠잠해져서 내 가슴이 다 진정되었다. 실력으로나 기세로나 기댈 수 있는 리더다.


안은 개인적으로도 각별하다. 첫해 계약직 신분일 때, 매니저에게 좋은 피드백을 주어서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나서서 말하는 것과 큰 책임을 지는 걸 두려워하는 나에게 넌지시 말할 기회를 주고 적당한 책임을 얹어 주었다. 개인적인 자리에서 나에게 Power를 원하지 않느냐고 물었는데, Power를 지니고 그에 걸맞은 여자가 나도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독려하는 것 같았다. 주로 겸손하고 받쳐주는 역할의 여자들을 보며 스스로를 사회화했는데, 그녀에게선 내가 쫓던 여자의 클리셰를 찾아볼 수 없다. 그녀를 보면 나도 내 정체성과 상관없이 역할에 충실할 수 있을 것 같다.


안이 떠나는 게 나만 아쉬운 게 아닌가 보다. 동료 둘과 작별행사를 열자는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때마침 쿤이 동료 1에게 관련 메일을 보냈다. 돈을 걷어 선물을 하고 같이 파이를 나눠 먹는 게 어떻냐고. 좋다. 내가 돈을 걷어 선물을 사겠다고 했다. 몇 가지 선물 아이디어를 냈다. 동료 1은 선물은 우리가 담당하는 대신 쿤보고 스피치를 하라 하자고 했다. 응? 번거로운 일은 우리가 다하고 멋들어진 스피치만 쿤을 시켜? 저번에도 자기가 나서서 대표로 덕담했는데 굳이 또?


동료 1에게 말했다. 네가 하는 게 어때? 쿤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나서서 말을 하잖아. 입술을 찡그리며 쿤을 따라 했다. '그동안 너무 잘했어~ 도전적인 일이 너를 성장시키길 바래~.' 흥! 됐고, 난 여자가 나서서 말하는 걸 더 많이 보고 싶어. 너도 스피치 잘하잖아. 할 수 있어. 그리고 화장실에 다녀왔다.


돌아오니 동료 둘이 낄낄거리고 웃고 있다. 왜 그러냐 하니 내 뒤쪽 벽을 가리키며 속삭인다. 뒤에 쿤이 앉아있었어...


헐? 나 집에 가야 하니...? 하...


내 속도 모르고 동료들은 한참을 끅끅거리며 웃는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쿤이 들었을까? 기분 나빴을까? 화가 났을까? 사과를 해야 할까?


면전에 대고 말한 것도 아닌데 사과하는 것도 웃기다. 못 들었을 수도 있고, 못 들은 척하고 싶을 수도 있다. 사과를 한다고 내 마음이 편해질 것 같지도 않다. 일단 사과는 안 하는 걸로.


사과할 일이긴 한가? 당사자를 희롱하듯 흉내 낸 건 기분이 나쁠 것 같다. 근데 내가 그 대화에서 꼬집은 건 늘 올드맨이 대표가 되는 현실이다. 개인마다 나이, 성별, 국적, 지향이 다 달라도 대표가 되는 건 거의 백인 남자다. 사적 모임에서만큼은 다른 얼굴들이 대표가 되길 바란다. 그런 마음이었지 쿤 개인을 욕 한 건 절대 아니다. 나는 그를 잘 모른다. 욕할 만큼의 감정이 없다. 일부 집단이 과대 대표되는 데서 느끼는 소외감과 불만이 쿤에게 투사되었을 뿐이다.


이미 뱉어버린 말 주워 담을 수도 없고 그날은 최대한 내 자리에 박혀 일만 했다. 마주치는 걸 피하는 게 서로를 위한 최선이다. 다음에 마주치면 모른 척 인사할 테니 부디 모른 척 받아주시길. 스피치까지 사양한다면 당신을 존경할지도 모르겠네요.

매거진의 이전글 니하오 몰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