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생활」 2023년 9월호에 채택 (주제 : 춤)
춤은 늘 동경하지만 닿을 수 없는 것이었다. 어릴 때 춤은 티브이로만 접했다. 티비 속 춤꾼들은 박력 있고, 요염하고, 사랑스러웠다. 멋지다. 자기 멋짐에 취해서 멋짐이 뿜어져 나온다. 그저 그런 나는 저렇게 되기 어렵겠지. 아쉬워서 웨이브 흉내를 내보았지만 섹시는커녕 어째 짠하다. 관두자. 나와 춤 사이엔 드높은 담이 생겼다.
하지만 인생은 알 수 없는 법. 미국 교환학생 시절, 스윙댄스 동아리 광고를 보게 된 것이다. 누구든 출 수 있다는 문구를 반신반의하며 찾아간 날, 스텝 밟는 법부터 배웠다. '트리플 스텝, 트리플 스텝, 락 스텝'을 입으로 외우며 오른쪽으로 세 발짝, 왼 쪽으로 세 발짝, 뒷 걸음 한 번이면 끝이었다. 경쾌한 재즈음악에 맞춰 발을 움직이면 춤 비슷한 게 되어 있었다. 이렇게 쉬운 거였다니. 어떤 한계를 얼렁뚱땅 넘어버렸다. 담을 넘고 싶으면 낮은 담을 찾는 것도 방법이다.
사교댄스이다 보니 이성의 손을 잡고 허리를 감싸는 정도의 스킨십이 있다. 어색할 것 같았는데 막상 해보니 처음부터 자연스러웠다. 남녀여도 담백하게 서로 만질 수 있구나. 만지는 사이인 우리들은 금세 친해졌다. 물론 끝까지 안 친해지는 사람도 있다. 만지면서도 서먹한 그와 나는 춤이 끝나는 즉시 반대 방향으로 멀어졌다...
스윙댄스는 구식이지만 성 역할이 정해져 있다. 남자가 리드하고 여자는 따른다. 남자는 방향을 바꾸고 밀고 당겨서 다음 움직임을 안내한다. 여자는 그의 의도를 알아채고 따른다. 구도가 별로지만 여자인 나는 별생각 없이 따라가면 되어서 할 만했다. 자기 움직임도 어색한데 남 리드까지 해야 하는 초짜 남자들은 골치가 아파 보였다. 근데 그들도 하다 보면 잘하게 되더라.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나도 이끄는 자리가 그냥 주어졌으면 다른 사람이 됐을까? 자리가 키워 준 사람. 리더가 어울리는 사람. 근데 그런 거창한 사람 말고 내 자리 의심이나 안 하는 사람이 되고 싶네.
동아리 모임은 강습과 자유 시간으로 나뉜다. 강습 땐 동작을 배우고 바로 파트너와 연습을 해본다. 바깥은 남자 원, 안은 여자 원을 만들어 두 원이 반대 방향으로 돈다. 파트너가 회전 초밥처럼 매번 도착하기에 초짜로서 편리하다. 자유시간이 되면 서로에게 춤을 청한다. 할 줄 아는 동작이 적은 초짜는 약간 쫄린다. 상대의 춤을 제한하는 것 같아서. 그래서 초짜끼리 자주 춘다. 그래도 용기 내 고수에게도 춤을 청한다. 고수는 지시가 분명하고 춤이 부드럽다. 매너 좋은 고수는 할 줄 아는 거 다 숨기고 기꺼이 초짜가 되어준다. 고수의 겸손에 대접받는 기분이 든다.
고수라고 다 매너가 좋은 건 아니다. 내 청을 수락한 어느 고수는 춤추는 내내 지루해 보였다. 눈은 허공에, 몸은 태엽장치 같았다. 스윙댄스는 사교댄스이고, 상대 봐가면서 춤 상대를 정하는 건 최악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대충 추는 차악을 선택했나 보다. 모두를 포용할 수 있을 그의 춤 실력이 무용해진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동호회에 들어 한동안 춤에 빠져 살았다. 벌써 10년 전이다. 딴 남자 만지는 걸 이해 못 할 현 남편을 사귀면서 춤을 멈췄다. 잊고 살았는데 이 글을 쓰다 보니 춤이 엄청 땅긴다. 스윙댄스를 검색해 보니 11km 거리에 강습이 밤 9시에 있네. 이젠 내가 춤추느라 남자 손을 잡아도 남편은 그러려니 할 테고, 나도 거리낌 없이 통보할 수 있는데 그 시간에 그 거리를 갈 만큼 끌리진 않는다. 다 한때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