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생활」 2023년 8월호에 채택 (주제 : 아기)
글은 본질적으로 자기의 이야기이고 나는 아기일 적 기억이 나지 않으므로 아기를 낳은 나에 대해 써보려 한다.
육아가 얼마나 미치고 팔짝 뛸 일인지 상세히 다루지 않겠다. 이 엄청난 일을 어떻게 알지도 못하면서 원할 수 있었는지. 난 내가 육아를 잘 아는 줄 알았다. 나에겐 늦둥이 동생이 있다. 동생은 내가 학원을 다니기 시작한 중1 때 태어났다. 공부하고 돌아와 아기랑 잠깐 놀아준 걸로 대단한 육아 참여를 하는 줄 알았다. 고등학교는 기숙사로 가버려서 기억은 '육아 잘했음'으로 마무리. 왜곡된 기억은 엄마 됨을 낙관하게 했다. 다음은 왜 원했나. 내겐 행복의 레퍼런스가 빈약했다. 20대 중반까지의 과업을 그럭저럭 해내 대기업에 들어갔지만, 일은 돈벌이 수단일 뿐 재미도 의미도 없었다. 일에서 행복을 찾을 수 없으니 만만한 행복의 출처는 가정이었다. 남편만으로 행복할 수 있을까? 주변에서 본 적이 없고 왠지 쓸쓸할 것 같다. 아기가 있다면? 많이 봐오던 그림이라 대충 행복해질 것 같다. 세상에서 말하는 결혼 다음의 과업이기도 했다. 내가 원하는 게 뚜렷하지 않으면 보편 같은 욕망이 안전하다. 리뷰 수 많은 구글 평점처럼.
그렇게 당도한 출산은 나를 기쁨의 나라로 데려갔지만 딱 그만큼 우울의 늪으로도 몰아넣었다. 기쁠 땐 남들도 이런 기쁨을 누리겠다 싶어 보편 인간이 된 듯했지만, 우울할 땐 아기가 힘겨운 사람은 나뿐일 것 같아 고독했다. 보편과 비교하면 기쁨은 별것 아닌 게 되고 우울은 마땅해졌다. 그럼에도 보편에 편입되고 싶었지만 방법을 알 수 없었다. 보편이 뭔지 모르겠기 때문이다. 내가 짐작하는 보편은 개개인의 면면을 보고 종합하여 내린 판단이 아니다. 그냥 느낌적으로 못난 나보다는 나은 누군가. 실체가 없고 일관성도 없었다. 아무것도 아닌 보편. 그것은 허상이자 내가 만든 사기꾼이었다. 내가 만든 사기꾼에게 낚이고 나와 아기만 덩그러니 남았다. 허무했다. 그래도 보편과는 안녕이다.
그래서 아기를 마이웨이로 키울 수 있었다. 남들이 다 한다고 그냥 하지 않았다. 이게 아기에게 정말 좋은 것인지, 마케팅일 뿐인지 내 직감과 자료조사로 결정해 밀고 나간다. 태아보험은 안 들었다. 치발기 대신 마른 오징어를 쥐여주었다. 드럼세탁기로 삶아 빤 면기저귀를 채웠다. 푹 끓인 된장국을 이유식으로 먹였다. 글 가르치기를 학령기 직전까지 버텼다. 어떤 건 성의 없고 어떤 건 미련해 보일 테지만 개의치 않았다. 자식과 관련된 아슬아슬한 일에서도 나에겐 스스로 판단하는 지력과 실천력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렇다고 아기를 엄청나게 사랑하느냐 물으면 선뜻 대답을 못하겠다. 아기를 낳으면 몰랐던 모성이 솟아나 전적으로 아기를 위해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럴 리 없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에게는 아기도 남이다. 아기가 아기일 때는 체념적 아량을 쭉쭉 뽑아냈지만 어린이가 되고는 아량 생산량이 나날이 줄고 있다. 자식이어도 무리하고 싶지 않다. 나한테 이유 없이 짜증 내고 화내는 걸 못 참겠다. 내가 뭘 해주는 걸 당연히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런 말을 자주 한다. '이 이상은 못해줘.', '예쁘게 말해.', '네가 자초한 거야.', '고맙다고 해줄래?' 자식한테도 이런 걸 보면 나는 애초에 베풂력이 딸리는 인간 같다. 자식이 반등의 기회일 줄 알았는데. 욕심내지 말고 계속 속 좁은 인간으로 살아야겠다.
아기에게 고맙다. 보편과 헤어지는 자유를 주었다. 내 안의 몰랐던 힘과 인색한 마음을 알게 해 주었다. 함부로 나를 틀에 맞추거나, 내 힘을 축소하거나, 너그러워지려 무리하지 않겠다. 그것이 아기가 준 가르침을 새기고 언젠가 아기에게 돌려줄 길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