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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푸른 Jul 25. 2023

비 맞아도 자전거가 좋은데

「조용한 생활」2023년 7월호에 채택 (주제 : 비)

한국에 있을 땐 비 맞으면 큰 일 나는 줄 알았다. 비 예보가 있으면 우산은 물론 수건도 챙겼다. 우산 없이 비를 만나면 비가 멎기를 기다리거나 급하게 우산을 샀다. 하지만 네덜란드로 이민 온 지 3년 간 우산을 쓴 기억이 없다. 주된 이동수단이 자전거이기 때문이다. 우산은 걸어서 이동할 때나 쓰니 우중산책 가지 않는다면 굳이 우산을 쓸 일이 없다. 다른 이유는 날씨. 네덜란드는 날씨가 변화무쌍하기로 유명하다. 비 예보가 있어도 언제, 얼마나 오는지 알기 어렵다. 향후 두 시간만 꽤 정확히 알려주는 어플이 있긴 한데 그것에 의존하느니 우비 뒤집어쓰고 나가는 게 속 편하다. 다행히 쏟아지는 비 보다 흩뿌리는 비가 더 잦아서 자전거로 다닐만 하다.


거의 다 초록색, 평지다.

차가 있으면 이동할 때 비를 피할 수 있지만 비 좀 맞더라도 내심 자전거 라이프를 즐긴다. 일단 자전거 라이프가 가능하다는 것으로 살짝 우쭐해진다. 지형적으로 네덜란드는 남동부 독일 국경 일부를 제외하고 죄다 평지다. 붉게 깔린 자전거 도로는 어디로든 이어지고, 보도블록 같은 턱이 있어도 어딘가에 꼭 완만한 경사로가 있다. 이런 인프라가 하루 아침에 구축된 것은 아니다. 자동차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1972년에 교통사고로 딸을 잃은 한 기자는 '아이를 죽이지 말라'는 제목의 칼럼을 쓴다.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 수많은 시민의 지속적인 투쟁과 협력을 일으켰고, 마침내 전국적으로 자전거 인프라가 확립된다. 지형적 이점과 새로 엮인 조상님들의 공덕. 두 가지 전제가 충족되어 차는 나에게 더이상 필수품이 아니게 되었다.


이는 내게 큰 해방감을 준다. 나는 한국에서 차를 몰던 1년 간 세 번이나 긁고 박았다. 성정이 조심스럽지 못하고 운전 스킬도 꽝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집 앞에서 목적지까지 한큐에 이동할 수 있는 장점에 맛들려 켕기는 마음으로 운전을 했다. 마음 속으론 주행 내내 오늘은 어떤 잘못을 저지를까 조마조마하면서. 그런데 차가 없으니 차의 유혹에 넘어갈 필요가 없다. 소유에 따르는 비용과 시간 소요에서 벗어난다. 메인 이동수단인 자전거에는 사치를 부려 전기자전거를 샀다. 성능이 굉장하다. 페달을 살짝 밟아도 앞으로 쭉쭉 나간다. 이 녀석으로 출퇴근을 하고, 뒤에 의자 두 개를 달아 학교와 집으로 두 아이를 수월히 옮긴다. 매일 내 몸을 움직여 이동과 운송을 수행한다. 완료할 때마다 긍지를 느낀다.


그 날은 비 예보가 있어서 레인코트와 등산화를 신고 집을 나섰다. 한적한 2차선 도로까진 흐릴 뿐이었는데 숲길에 들어서자 비가 내린다. 이번 비는 제법 비답다. 레인코트가 덮지 못한 무릎 언저리가 많이 젖었다. 평소처럼 일을 하다보니 비가 멎었고, 점심을 먹었다. 급속도로 하늘이 고동색으로 바뀌고 탁한 구름이 가득 찼다. 비가 거세게 내리고 바람까지 세차게 부는지 가로수들이 촐싹맞은 키다리 풍선처럼 휘청인다. 사람들이 통유리 창에 다가가 밖을 본다. 날씨가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바뀌지? 집에 어떻게 가지? 말들이 오간다. 나는 아이 하교시간에 맞춰 퇴근해야 하는데. 망했다.


겁이 난다. 머리는 이성적으로 굴어본다. 미리 걱정하는 건 도움이 안 되니 일에 몰입하자. 하지만 집중이 안 되고 어떡하지 하는 생각만 맴돈다. 바깥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나머지 눈앞에 현실과 유리된 것 같다. 패닉 상태로 있다보니 갈 시간이 되었다. 노트북을 정리하고 레인코트를 입는다. 동료들이 놀란다. 지금 간다고? 늦게 가지! 혹시 수영은 할 줄 아니? 행운을 빌어, 살아남아. 나는 곤란하게 웃으며 나섰다. 비는 꽤 왔지만 그세 바람이 멎어서 자전거로 갈만했다. 강력한 돌풍은 지난 것 같다. 숲길에 들어서니 비명횡사한 나무가 길을 막고 있었다. 스산한 마음으로 학교에 도착하니 반짝 해가 났다.

막상 비바람을 맞으니 별일 아니었다고, 머릿속에서 과대 증폭된 공포는 역시 믿을 게 못 된다는 교훈을 얻고 싶다. 하지만 이제 공포감은 훈련용이 아닌 실제 경보다. 최근 몇 년 간 세계 곳곳의 해괴한 날씨를 듣고 직접 겪으니 자연 재해의 강도와 빈도 상승은 몸도 아는 팩트가 되었다. 비상사태의 대피 수단으로 자전거는 못 미덥다. 이 일이 계속 걸려서 차를 사기로 했다. 누가 알았겠나. 차를 무소유 할 전제에 보통의 날씨가 있을 줄. 근데 차마저 못 미더운 날이 올까 두렵다. 일단 인간이 쓸 수 있는 수는 다 써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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