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생활」2023년 6월호에 채택 (주제 : 선물)
초등학교 5학년 때, 부모님은 헌 옷 일을 시작했다. 아빠가 의류함을 돌며 옷을 걷어와 야적장에 쌓으면 엄마는 그중 상태 좋은 옷을 골라 구제 샵에 팔았다. 엄마는 당연히 우리 가족의 옷도 골랐다. 헌 옷이라는 명명이 무색하게 사용감이 거의 없고 원단 좋은 옷들을 가져다주었다. 나는 옷이란 돈 주고 사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과 함께 어른이 되었다.
하지만 어린이일 때도, 사춘기 때는 물론, 성인이 되어서는 관성에 의해 주변에 내 옷의 출처를 밝히지 않았다. 옷의 질과 상관없이 남이 버린 옷을 입는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부끄러워하는 게 부끄러운 줄은 알아서 내색하진 않았지만 굳이 드러내지 않았다. 스무 살 너머서 부터는 내 옷 중 엄마의 지분이 줄기 시작했다. 일부는 사 입기 시작한 것이다. 옷에 돈을 안 쓰다 쓰려다 보니 헉 소리 나게 비쌌고 아까웠다. 새삼 부모님 직업에 감탄했다.
서른이 너머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후에도 부모님은 계속 하던 일을 하셨다. 엄마의 주요 타겟은 손주가 되었다. 배냇저고리부터 우주복, 내복, 외출복, 잠바, 신발 등 '의'에 속하는 모든 물건이 엄마로부터 공수되었다. 몸이 금방 자라는 아기들은 새 옷에 큰 흔적을 남기지 않고 다른 옷으로 넘어간다. 엄마는 그런 옷 중에서도 새 것 같은 옷만 골라다 주셨다. 가끔은 아동복 사업이 망한 결과로 무게당 단가에 황급히 처분된 새 옷을 무더기로 갖다 주었다. 감사했다. 그런데 많아도 너무 많았다. 엄마도 새 옷의 운명이 안타까워 버리지 못하고 나에게 가져다주는 것 같았다.
그 때 주변에 아이 있는 친구들에게 이 옷들을 선물로 주고 싶었다. 아이 옷은 비싸고, 몇 번 입지 않았는데 새로 사야 하는 수고로움을 알기에 새 옷 같은 헌 옷의 유용함을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헌 옷이긴 하므로 무례해질 위험부담이 있다. 그래서 선물하기 전 공들여 수락을 청한다. 부모님이 하시는 일을 알리고 그 과정에서 상태 좋은, 심지어 택도 안 뗀 새 옷이 자주 발굴되며, 그래서 우리 아이도 너무 입히고 있다는 후기까지. 맥락을 만든 후 묻는다. 옷이 너무 많아서 그런데 혹시 너에게 주어도 될까?
안 하면 그만인데도 힘들여 물어보는 내가 이상하다. 그만큼 주는 기분은 짜릿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짜릿함은 바닐 봉지 하나를 주더라도 쉽게 얻을 수 있지만 내 짜릿함을 위해 상대방을 받는 사람으로 이용할 순 없다. 그래서 묻는다. 내가 주는 사람이 될 기회를 줄 수 있는지.
나이 앞자리가 두 번 바뀌며 부모의 직업과 그에 따른 위치를 드러내는데 거리낌이 없어진 것도 느낀다. 올려다 볼 위치는 아니겠지만 낮춰본다면 그건 그 사람의 성숙도 문제다. 우리는 시선에 의해 낮아지지 않는다.
어떤 친구는 흡족해하며 받고, 어떤 친구는 예의상 받는 것 같았고, 어떤 친구는 처음부터 거절했다. 흡족해한 친구는 엄마의 단골이 되어 묻지마 선물을 때때로 받았다. 예의 바른 친구에겐 다음 번에 옷 보따리를 펼치고 선택권을 주었다. 어차피 버릴 테니 마음에 드는 것만 가져가라고. 가져가면 도움이 되는 것 같아 좋았고 가져가지 않으면 그의 참 뜻을 알게 되어 다행이었다. 나의 주는 기분을 지켜준 배려가 고마웠다. 거절한 친구는 그에게 이미 내가 솔직해도 되는 사람이라 좋았다.
1년 전 쯤, 부모님은 헌 옷 일을 그만두셨다. 가업을 접은 먹먹한 서운함으로 한동안을 보냈다. 옷은 이제 제 값주고 사야 하고, 나는 이제 쉽게 주는 사람이 될 수 없다. 받는 사람 눈치를 보느라 정작 주는 사람이 되게 해준 부모님의 노고를 가벼이 여겼다. 옷을 수합하고, 거대한 옷 산에서 깨끗한 옷을 고르고, 받는 이의 사이즈와 취향에 맞게 분류하고, 만날 때 직접 가져다주는 등, 각 단계를 충실히 수행하여 널리 인간세계를 이롭게 하는 그 중심에 나를 두어주셔서 깊이 감사드린다고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