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이해와 배려에 대한 독후감
쏟아지는 빗소리에 잠을 설쳤습니다. 뒤척이다가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 창을 열어 봤어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비였습니다. 고양이는 잔뜩 겁을 먹고 얇은 홑이불 속으로 파고 들어가더군요. 그러고는 아침이 되었습니다. 누군가의 안위를 걱정하는 밤이 지나간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다정한 사람은 아닌데, 모르는 사람의 집이 물에 잠길까 봐 잠을 설치는 사람은 아니라는 말이지요. 뉴스에 그런 이야기가 나오면 그저 어떡하면 좋냐... 하고 근심하는 사람일 뿐인데...
맞습니다. 가까운 누군가의 집이 걱정입니다. 지대가 너무 낮아서 한꺼번에 많은 비가 쏟아지면 순식간에 거실과 방으로 물이 들어온답니다. 얼마 전에 그렇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무슨 본능이 발동한 것처럼 그러면 앞으로 어떡하느냐고 미리 막을 방법은 없느냐고, 동 사무소든 시청이든 연락을 해봐야 하는 건 아닌가. 내가 뭐라고, 당사자를 앞에 두고 호들갑을 떨었더랬죠. 집에 돌아와 생각했습니다. 그런 아우성 따위가 그 사람에게 무슨 도움이 되었을까. 차라리 가만히 들어주는 게 훨씬 나았을 텐데. 나의 오지랖이 더 아프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아버린 겁니다. 타인을 듣는 일은 침묵과 여백을 견디는 일일 텐데, 쉽게 결론 내리지 않고, 말의 맥락과 마음의 주름을 더듬어가는 일. 그것이야말로 타인에 대한 깊은 존중이자, 우리가 흔히 말하는 '배려'라는 단어의 본질일 텐데 말이지요. 참으로 늦게 알아 버렸습니다. 나라는 사람은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 너무 많은 말을 하고, 너무 적게 듣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말이죠.
김현우 작가의 [타인을 듣는 시간]에서 발견한 듣기 방식을 살펴 가면서 나는 그날의 호들갑을 떠올렸습니다. 한편 어떤 부러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작가가 과감하다는 사실에서 기인합니다. 어쩌면 용기 있다고 할 수 있는, 타인의 고통 속으로 직진해 나아가는 과감함이 있습니다. 상대가 말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이죠. 이것을 '경청'이라고 하던가요.
듣는다는 현상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듣는 중이라는 건 그저 믿음입니다. 말은 상대방 안에서 말이 되어가는 중이고 내 안에서는 이해가 되어가는 중이라는 거죠.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에서 진정한 소통이 되어가는 중입니다. 들으면서 타인의 세계로 건너가는 중이며,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듯 스며드는 상태를 이어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듣기는 엄청나게 능동적이기도 하고 지나치게 수동적이기도 합니다. 판단했다가 해체되고 영 아무것도 아닌 순수한 받아들임에 가까워지기도 합니다.
작가는 타인을 잘 듣기 위해 그들의 현장을 찾아갔고, 그 이야기를 담은 논픽션을 읽었습니다. 노동자의 땀방울에서, 이주민의 향수에서, 소수자의 절망에서 피어나는 말들과, 작가가 탐독한 글들이 만나는 지점에서 비로소 진정한 듣기의 자세가 드러납니다. 이 방식의 핵심은 '내가 이해하고 싶은 것을', 내가 읽은 책을 매개로 그러면서도 성급한 해석을 담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가 만난 사람들의 숨소리, 그가 읽은 글들의 여운이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책 안에서 울려 퍼집니다. 다른 세계로의 여행, 다른 존재들의 언어와 삶의 맥락을 내 몸의 감각으로 받아들이는 여정입니다. 작가는 타인을 해석하거나 분석하지 않습니다. '그가 왜 그런 말을 했는가'를 파악하려 하기보다, '그 말을 할 수밖에 없었던 세계'를 함께 경험하려는 사람입니다. 진정한 배려는 그래야만 가능하다는 걸 보여줍니다. 어떤 인간이 타인의 세계를 온전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생각만으로도 참 근사합니다.
"이해하려 하지 말고, 먼저 들어야 한다." 그것은 관계의 가장자리에 스스로를 데려다 놓는 일이고 그 자리에서, 타인의 고통이 나에게 스며들도록 조용히 기다리는 일입니다. 그 여백과 윤리를 경험할 때, 비로소 '듣는다'는 것은 행위가 아닌 삶의 태도가 된다는 저자의 말이 큰 울림으로 남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