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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산책

기억으로 가는 길ㅣ파트릭 모디아노

by 김설

『기억으로 가는 길』은 모디아노가 작가로서 자신의 근원과 체험, 특히 글을 쓰게 된 동기를 직접적으로 파고드는 장편소설이다. 단순히 향수에 젖어서 하는 회상이 아니라, 몽유병 환자처럼 자신이 살아온 과거를 이해하려는 욕망에 못 이겨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여정을 쓴 것이다.

“모디아노가 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동기를 이렇게까지 직접적으로 밝힌 작품은 없었다"라는 프랑스 언론의 평가와 “작가로서 더 이상 쓸 이야기가 남아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라는 독자들의 반응이 이 책을 펼친 강력한 동기였다.

나에게도 애를 써도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 있다. 그 기억이 내 삶에 줄곧 따라붙어 오랜 시간 괴로웠다.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글로 옮겼고 그게 다행한 불행이다. 나는 모디아노도 비슷한 이유로 책을 썼을 거라고 확신한다. 서로 다른 점은 나는 에세이 그는 소설이라는 것 정도.


모디아노에게 파리는 기억의 등고선이다. 오래된 간판, 사라진 카페, 누구도 더 이상 부르지 않는 거리 이름이 서사 전체를 이끈다. 인물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설명하는 대신, 자신이 서 있던 자리의 온도와 냄새를 떠올린다. 모디아노는 이 공간의 느낌을 문장으로 바꾸고, 독자는 그 문장을 손끝으로 더듬게 된다.

한 끼의 식사처럼 평범한 일상과 사소한 대화, 우연히 들른 카페의 의자, 공중전화의 금속 냄새 같은 자잘한 감각들이 깨어난다. 그 변화의 끝에서 알게 된다. 무언가를 ‘찾는 일’은 사실 ‘기억하는 법’을 다시 배우는 일이라는 것을.

소설은 몽환적이면서도 묘하게 선명하다. 장면과 장면 사이에는 늘 작은 안개가 자욱하지만, 그 안개가 시야를 전부 가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덜 보이기에 더 주목하게 된다. 나는 문장을 따라 숨을 고르고,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흑백 사진의 콘트라스트가 조금씩 올라가는 기분을 느낀다. 모디아노는 거대한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를 정확한 어떤 지점으로 데려간다.
모디아노의 인물들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들을 불러줄 누군가가, 아직 이 도시 어딘가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억으로 가는 길’은 동시에 ‘사람에게로 가는 길’이다.

만약 이 책을 카페에서 읽는다면, 너무 조용한 곳보다는 오래된 스피커에서 잔잔한 재즈가 흐르는 레트로 감성의 공간이 좋겠다. 컵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창밖을 스치는 그림자, 라테의 미세한 거품. 그런 자잘한 잡음이 오히려 모디아노의 문장 결을 더 선명하게 만들 것이다. 완벽한 침묵보다 ‘살짝 흔들리는 일상’을 배경으로 읽기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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