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느린 작별 | 정추위
아주 느린 작별 | 정추위 | 2025 | 다산북스
손톱이 자라는 속도로, 머리카락이 희어지는 속도로, 사랑하는 사람은 떠나간다.
정추위의 『아주 느린 작별』을 읽는 동안 나는 계속해서 시간의 질량을 생각했다. 남편에게 치매가 왔고, 이별의 무게는 매일매일 조금씩 쌓여간다.
언어학자인 저자는 사랑하는 사람의 언어가 한 글자씩 지워져 가는 과정을 기록한다. 그것은 오래된 흑백사진이 바래 가는 것 같다. 선명했던 윤곽이 흐릿해지고, 진했던 색깔이 옅어지다가, 결국 하얀 종이만 남는 것. 그런데 사진과 다른 점이 있다. 사진은 바래도 기억 속엔 선명하게 남아 있지만, 치매는 기억마저 사라진다.
책을 읽으며 내 입에서 맴도는 말을 헤아려 보았다. 남편에게 아직 하지 못한 말, 차일피일 미뤄 둔 말, 용기가 없어서 삼켜 버린 말. 그 말들이 마치 목 안에서 작은 돌멩이처럼 굴러다니는 것 같다.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직은 푸른 잎사귀의 나무들이 서있다. 가을이면 잎은 모두 떨어지겠지만 그때도 여전히 나무일 것이다. 기억을 잃은 사람, 언어를 잃은 사람도 여전히 그 사람일까.
대화는 단순히 정보를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행위다. "안녕"이라고 말하며 상대방이 안녕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한다. "잘 자"라고 말할 때 상대방의 밤이 편안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한다. 그런 일상적인 말들이 사라진다면, 어떻게 사랑을 확인할 수 있을까. 남편에게 고마움을, 딸에게는 미안함을, 또 누군가에게는 그리움을 전하고 싶다.
정추위 작가의 글을 읽으며 깨달았다. 아주 느린 작별 대신 아주 빠른 고백을 해야 한다는 것을. 망설임의 속도보다 사랑의 속도가 더 빨라야 한다는 것을. 언어가 사라지는 속도보다 사랑을 표현하는 속도가 더 빨라야 한다. 이 책이 준 가장 아프고 가장 소중한 깨달음이다.
#아주느린작별 #정추위 #협찬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