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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설 Mar 29. 2020

기억 속에 챙겨두는 것

피곤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아침이면 언제나 그렇듯 카페라테를 사러 길을 나선다. 집에서  우유 거품을 내는 일이 영 여의치 않아서 카페 라테는 꼭 사서 마시게 된다. 젖소가 우유를 만드는 과정에 대한 불편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서 얼마 전부터 두유 라테를 찾아다니고 있지만 두유 라테를 만들어 파는 곳을 만나기는 힘들다. 거품기를 장만해야 한다는 생각에 틈만 나면 쇼핑몰을 뒤적거리며 싸고 질이 좋은 제품을 찾지만 그런 제품이 있을 리가 없다.

다른 날과 다름없이 라테 한잔에 샷을 추가하고는 컵을 손에 들고 산책을 나섰다. 보통은 이른 시간이라 한산하지만 얼마 전부터 선거 때문에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 핑크  점퍼를 입고 다니는 후보와 주황색 점퍼를 입고 다니는 후보를 자꾸 마주친다. 핑크색 점퍼의 후보는 선거가 아니라면 본인도 입을 리가 없을뿐더러 그렇게 눈이 피곤한 핫핑크색 옷을 입은 여자에게는 평생 말도 걸지 않게 생긴 엘리트 코스만을 밟고  젊은 남자다. 고생 한번  하게 생긴 데다가 피부까지 곱디고운. 새파랗게 젊은  변호사가 무슨 민생의 고충을  것이며  아픈 곳을 긁어주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반대로는 엘리트에 대한  선입견을 여지없이 깨버릴 무거운 도끼 같은 청년 정치인이   탄생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동시에 든다.

불편하기 이를 때가 없다. 선거 전까지 내가 알아서 검색하고 마음에 드는 후보를 고를 텐데 자꾸만 악수를 하자고 손을 내밀고 말을 건다. 코로나 시국에 무슨 악수를 한단 말인가. 말을 건네는 것도 별로다. 지금은 그들이 내게 할 말이 있는지 몰라도 나는 듣고 싶지 않다. 그들은 정작 내가 할 말이 있을 때 모른 척한다는 걸 경험을 통해 나는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핑크색 점퍼 입으신 분과 그의 무리들은 불편하다.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









이번엔 주황색 점퍼다. 핑크색 점퍼와 인사를 하고 몇 걸음을 걷다가 주황색 점퍼와 마주쳤다. 나는 주황색 점퍼와 짧은 인연을 맺은 적이 있다. 그 후보는 우리 동네에서 책방을 운영했던 적이 있다. 지금은 다른 분에게 넘기고 책방을 정리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은 있지만 확실한 이야기인지는 모르겠다. 그때나 지금이나 작은 책방을 운영하는 고충은 크다 그분 역시 운영난 때문에 적잖이 고생을 하는 것 같았다. 책을 많이 읽다 보니 자주 들르게 되었고 책 방의 뒷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굳이 알아서 좋을 게 없는 이야기였다. 그 당시 이미 정치의 포부를 키우는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터라 실망이 이만저만 큰 게 아니었다. 그래도 설마 하는 마음이 있었던 건 남의 이야기를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뒷 말이라서 실제와는 다른 부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끝까지 믿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아마도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밑도 끝도 없는 신뢰와 묘한 동료의식 같은 것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러던 중 우연히 시에서 현금을 지원받을 수 있는 사업에 작은 책방이 참여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고 책을 많이 접하는 사람의 의견이 필요하다며 나에게까지 연락이 왔다. 성격상 남의 일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건 죽어도 못하는 편이라 몇 번을 고사했지만 결국 미팅 자리에 앉게 됐다. 차마 이 곳에 다 말할 수 없는 이야기가 그곳에 있었다. 결론적으로 주황색 점퍼의 그 사람과 그 사람이 속한 정당까지도 괜스레 믿을 수가 없어졌다. 게다가 주황색은 개인적으로 핑크색보다 더 싫어하는 색깔이다. 물론 그 정당에 대해 좋다 나쁘다 라고 의견을 낼 만큼 아는 것은 별로 없다.












나는 기억력이 쓸데없이 좋다. 그런데 그 기억력이라는 것이 묘하다. 좋은 것보다 나쁜 것을 더 오래 기억하고 전체적인 맥락과는 조금 동떨어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날의 분위기라든가 공간, 사람들의 동선이나 앉아있던 위치 또는 누군가가 입었던 옷이나 특유의 냄새, 특히 사람이 지닌 눈빛에 대한 기억력이 남다른 편이다. 그래서 글이라는 걸 끄적이고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남들은 쉽게 잊어버리는 것들이나 남들은 평생 한 번도 곱씹어 본 적이 없는 그야말로 쓸모없는 것들을 기억한다. 짐작하겠지만 일부러 그러는 것도 아니고 학습을 통해 기억력이 좋아진 것도 아니다. 타고난 것이라고 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무의식적으로 지나치는 일이 별로 없고 무엇이든 의식화되는 경향이 있다. 혹자는 나 같은 사람을 두고 뒤끝이 있다든지 한번 찍히면 용서가 없느니 말이 많다. 또 그런 평가가 영 틀린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기억력이 좋으니까 오랫동안 잊지 못하고 남들보다 오래 아프고

혼자 외롭게 끙끙댄다. 남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기억할 필요 조차 없는 일이 대부분이라서 남들에게는 언감생심 한마디 못하는 외로움이다. 더더욱 말을 못 하는 또 한 가지 이유는 좀팽이라는 수식어가 붙을까 봐 소심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왜 쉽게 잊는 것일까. 뭔가를 기억하는 일을 왜 귀찮아하게 된 걸까. 사람들은 왜 뭐든지 잘 잊어버려서 오래 기억하는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까. 머리 아픈 일은 모조리 다 잊어버려야만 겨우 살아지는 세상이라서? 이번 총선에 출마한 후보 중의 37프로가 범죄 전과가 있다는 말을 조금 전 뉴스에서 들었다. 사람들은 웬만한 것은 다 잊어버리자고 나 몰래 모두 새끼손가락이라도 걸고 약속을 한 것 같다. 쓸데없는 것들까지 다 기억하는 내 기억력도 피곤하지만 사람들의 무딘 기억력은 아쉽다 못해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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