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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설 Apr 09. 2020

나는 길들여지기 싫다

생을 바꾸기에 너무 늦은 때란 없다







내가 아무리 시시콜콜한 글을 좋아하고 고집한다고 해서 시시콜콜한 글을 쓰는 작가만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 중에 으뜸으로 치는 사람이 있다면 단연코 마루야마 겐지를 들 수 있다, 마루야마 겐지의 책은 시시콜콜과는 거리가 아주 먼 진지하면서도 책장의 마지막 장을 덮고도 한동안은 머릿속에서 생각이 멈추지 않고 결국 다시 찾아 읽게 되는 심도 있는 내용으로 글을 쓰는 작가이다. 하지만 혹시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 내 말만 믿고 나를 따라서 마루야마 겐지의 책을 읽는다면 적잖이 실망할지도 모른다. 애석하게도 마루야마 겐지는 누구나 좋아할 만한 내용을 가지고 글을 쓰는 작가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마루야마의 겐지가 좋을까. 가장 큰 이유는 다른 사람들에게 표적이 될 만한 말을 서슴없이 하는 용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고 독자들의 선호로 먹고사는 사람인 작가의 경우에는 더욱 어려운 일이다. 겨우 몇 가지 매체를 통해 미천한 글을 발행하는 나도 누가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어도 혼자서 이런저런 눈치를 보느라 바쁘다. 욕을 먹을게 분명한 데다가 보이지 않는 적을 만드는 일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는 것은 보통 사람으로는 하기 힘든 일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 사회가 정하는 규범 안에 있지 않다는 사실만으로 공공의 적이 된 사람을 나는 적지 않게 봐왔기 때문이다.


내 브런치를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들이나 우연히 들어오게 된 사람, 좋든 싫든 그들의 날카롭고 냉정한 시선을 적당히 피해 가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들의 눈을 피하고 싶다면 애초에 브런치가 됐던 블로그가 됐던 모든 발행을 멈춰야 한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만둘 수 없고 어느 정도는 재미를 붙여버린 글쓰기를 포기할 수 없는 노릇이다. 내 마음은 당연히 사람들의 이목을 적당히 끌면서 나름대로는 좋은 평가를 받고 싶다는 쪽으로 흐르고 악성 댓글이 달려서 자신의 글이 시끌벅적해지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다. 애정을 가지고 이리저리 공들여 꾸며 놓은 나의 가상의 공간이 망가지는 것이 겁이 나서 과하다 할 정도의 자체 검열을 하게 된다. 이 글을 써도 될까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는 게 아닐까. 나를 어떤 사람으로 생각할까. 나도 그런 면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다. 실제로 진짜 나라는 사람과 내가 발행한 글에서 보이는 나는 얼마간의 격차가 존재하고 생각보다 그 격차는 크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이유로 항상 내면에 갈등을 쌓인다.












다시 마루야마 겐지를 향한 애정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마루야마 겐지는 나와 닮은꼴이 적지 않다. 큰 틀에서 보자면 생각의 근본은 비슷하지만 마루야마 겐지는 행동파였고 타고난 쫄보인 나는 생각으로만 그쳤다는 점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마음으로는 마루야마 겐지처럼 할 말을 대차게 내지르고 싶지만 여러 가지 여건상 눈치만 살피고 살았으니 용감하고 대쪽 같은 성격의 마루야마 겐지를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이렇게 확실하게 대리 만족감을 주는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다.

콩나물시루 같은 대도시의 만원 전철에 갇혀 도시의 한 귀퉁이로 출근하고 더러운 공기를 마시면서 불필요한 인간관계에 마음을 썩이면서 그는 생각했다. 가장 좋은 젊음의 시기를 지우개처럼 갉아 없애는 것은 하지 않겠다고. 그러려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소설가가 되었다. 산골로 내려가 산행을 즐기며 몸과 마음을 단련하고 자신만의 글을 쓰려고 노력했고 괄목할만한 성과도 있었다. 여기 까지라면 흔하고 뻔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내가 그를 눈여겨보았던 점은 이런 것이다. 어느 모로 보나 옳은 사회적인 규율에는 순순히 따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묵살하거나 거절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일본의 역사나 문화 습관 그 밖에 잡다한 불문율에 얌전히 따르는 법이 없는데 이 점은 일본인 특유의 고분고분함 하고는 반대되는 행동이기 때문에 일본 문학계에서도 왕따를 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재밌는 것은 휴일이나 공휴일도 자신이 정해서 쉬고 딱 이 사람이다 싶은 사람이 없으면 투표에 나서지도 않는데. 마루야마 겐지의 일생 중에 딱 한 번 투표를 한 적이 있다고 한다. 물론 투표를 하고 나서 사람 보는 눈이 잘못된 것을 깨닫고는 더욱 투표에 관심이 없어졌다고 한다. 여러모로 재미있는 사람이다.

마루야마 겐지는 자식이 없다. 자식을 낳을 만큼 이 세상이 좋은지 의심하는 마음이 젊을 때부터 있었다고 한다. 나는 이 부분에서 크게 감동받았다. 자식을 낳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길이라는 개소리를 들으면 내가 자식을 낳아 기르며 했던 마음고생이 떠올라 욕이 나온다. 여자들에게 아이를 낳지 말라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고 싶지만 그런 오지랖을 떨었다가는 그야말로 대한민국에서 추방당하는 처지가 될 것 같아서 용기를 내지 못했다. 태어난 이상 이 풍진 세상과 싸워야 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끔찍한 대물림을 굳이 시킬 필요가 있을까 끊임없이 고민했지만 나는 결국 마루야마 겐지 같은 용기가 없었고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남자와 결혼을 하지 못한 탓에 딸자식 하나를 낳았다.

그때 마루야마 겐지를 알았더라면 나의 선택은 애당초 달라졌을 것이 분명하다. 마루야마 겐지가 말했다.




인간이 인간인 한 아무리 시대가 발전하고 문명이 발달하고 의식이 변한다 해도 태어나기를 잘했다. 낳아준 부모에게 감사하고 싶다고 할만한 세상은 오지 않는다. 순간적으로는 몰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게 세상이 변하는 일은 어지간히 축복받은 이상론자와 낙천가의 뇌 속이 아니고는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마루야마 겐지는 늘 냉혈한 인간처럼 말하지만 한 발자국만 더 가까이 가서 그를 세심히 들여다보면 그가 얼마나 자신만의 확실한 기준을 가지고 사는 인간인지 알게 된다. 나에겐 마지막에 도달하고 싶은 세상이 있다. 그곳에 도착하면 어떻게 살고 싶은지 마음속으로 상상하면서 살았다. 내가 꿈꾸는 세상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과 달랐고 사회가 요구하는 것과도 반대인 경우가 많았다. 보통의 사람들과는 다른 선택을 하고 싶을 때마다 나는 남몰래 죄의식을 키워왔다. 전부 다 내가 잘못 성장한 탓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천편일률적으로 그렇게 배웠고 학교에서도 도덕이라는 것은 무조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갈팡질팡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삶이었다. 그렇다고 남들의 손가락질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고 눈앞의 펼쳐진 길이 고난의 길인 줄 알면서 기꺼이 그 길을 나서고 가장 먼저 깃발을 꽂을 용기가 없는 나에게 마루야마 겐지는 믿을만한 선구자다. 나만 이런 생각을 했던 건 아니구나.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이 세상에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을 만나는 일은 이렇게 감격스럽다.




천국과 지옥이 뒤죽박죽 섞여있는 모순 투성이인 이 세상의 일원으로 살아갈 운명이라면 살아가기 위한 분명한 의미를 찾아야 하고 삶에 끝없이 도전해야 한다고 마루야마 겐지는 말한다. 성가시고 힘겨운 시련이고 한 번은 몰라도 두 번은 못하겠는 것이 사람의 삶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진정 자립한 인간으로 살아가라고 힘주어 말한다. 비관적인 생각에 매몰되어 인적이 드문 시골로 낙향해 제멋대로 사는 것으로 오해하면 마루야마 겐지라는 작가를 몰라도 한참 모르는 거다. 그는 어떤 소설가보다 인간과 세계에 대한 관심이 높고 좋은 글을 쓰기 위한 부단한 노력을 하고 있으며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지나치다 싶을 만큼 자기 절제를 한다. 나는 그가 쉽게 길들지 않는 인간이라는 점이 특히 마음에 든다. 정곡을 무참히 찌르는 말에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사회에 적당히 길들여져 편안하게 살기만을 은근히 바라고 쉬운 길로 편승해 어물쩍 넘어가며 평생을 살아왔지만 언제나 이건 아닌데,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런 나에게 마루야마 겐지는 늘 질문한다. 언제까지 고분고분하게 살 거냐고. 너의 잠들어 있는 능력은 돌아보지 않고 언제까지 평화로운 교류만 하면서 안온함 만을 추구하며 살 거냐고. 이제는 인생을 완전히 다른 기류로 바꾸기에는 나이가 들었다는 핑계로 계속 이렇게 살다가 죽을 때가 되면 아. 이번 생은 망했다. 다시 태어난다면 망해버린 이번 생과는 조금 다른 괜찮은 인간으로 살고 싶다고 회한에 젖은 채 세상과 이별을 하려고 했더니 마루야마 겐지가 그런 내 계획을 꾸짖는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그렇게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이대로 죽어갈 목숨이 아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마루야마 겐지는 딱 거기까지다. 자신이 해줄 말은 여기 까지라는 것을 냉정하게 못 박는다.어차피 정답이 없음을 그도 안다. 평온하고 무사함만을 추구하고 도전이라는 것을 무모함이라는 관념 안에 가두고 얌전히 삶과 사회에 순응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짜 잘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결국 어떤 생각으로 삶을 꾸려갈지 선택은 오로지 자신의 몫이다. 반들반들하게  길들여진 사람으로 살 것인가. 끝까지 삶에 반기를 들고 도전하는 삶을 살다가 죽을 것인가.










마루야마 겐지는 자신만을 사랑하는 나르시시즘 환자로 오해받거나 비관주의자로 보이기 쉽고 그 사람을 좋아하는 나 또한 그런 사람으로 보일까 염려되지만 어차피 이 글을 시작한 이상 읽는 이의 생각을 내가 조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셔라. 어쨌든 지금은 마루야마 겐지를 등에 업었고 평소에는 없는 용기가 웬일인지 조금 생겨서 하는 말이다. 물론 내일이면 이 글이 후회의 단서가 될지도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한참을 골똘히 생각해 봤는데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 이 글을 삭제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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