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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은 모든 존재 안에 있다.

♬박시환 | 떠난다

by 로제

"그러니 자네는 죄인 안에서, 자네 안에서, 모든 사람 안에서 생성되고 있는 붓다, 가능성을 지닌 붓다,

숨겨져 있는 붓다를 존경해야만 하네."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그가 보기에 모든 것이 가치 없는 일이었다. 모든 것이 거짓이었고, 모든 것이 악취를, 거짓의 악취를 풍겼다. 모든 것은 의미 있고 행복하며 아름다운 것처럼 가장한 듯 보였다. 그 모든 것은 어쩔 수 없이 썩어 없어질 것이었다. 세상은 쓰고, 인생은 번뇌였다.

-29p


"오직 깨달음이 존재할 뿐이지. 그것은 어디에나 있네. 그것은 내 안에 있고, 자네 안에 있고, 모든 존재 안에 있네. 나는 깨달음 앞에서는 알고자 하는 것, 즉 배움보다 더 사악한 적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네."

-39p


이 사랑스러운 강가의 숲속에서 오늘 마침내 죽음에 이른 것은 바로 그것이 아닐까? 그가 지금 어린아이처럼 그토록 신뢰에 가득 차고, 그토록 두려움 없이, 그토록 기쁨에 가득한 것은 그 자아의 죽음 때문이 아닐까?

-165p


"오, 일체의 번뇌는 시간이 아닌가, 자신을 괴롭히는 것과 자신을 두렵게 하는 것 모두 시간이 아닌가, 그러면 시간을 극복하는 즉시, 시간을 없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그 즉시, 이 세상의 모든 힘든 일, 모든 적대감은 사라지고 극복되는 것 아닌가?"

-180p



헤르만 헤세의 소설 속 주인공 '싯다르타'는 관습을 파괴하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구도를 행했던 인물이다.

브라만 계급의 태생임에도 사마나(탁발승)가 되기를 자처하고, 그러다 세상의 온갖 유혹에 빠져들고, 다시 모든 걸 뒤로한 채 떠나고, 뱃사공의 조수가 되고...


깨달음을 얻기 위한 여정은 정말이지 쉽지가 않다.

그러니 깨달음을 구하는 일을 흔히 고행이라 하지 않던가.


그런데 싯다르타의 행보에서 독특한 점은,

구도자였던 그가 돌연 속세의 길을 택한 게 바로 세상을 이해하고 사랑하기 위한 '빅픽처'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그간 사람들의 이미지에 각인된 탁발승의 이미지와 대립되는 지점이다.

속세의 유혹이 오더라도, 끝까지 굴하지 않고 멀리하는 게 구도자의 자세가 아니던가?


그렇지만, 이는 싯다르타가 철저한 경험주의자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내내 누군가의 가르침이나 지식보다도

자신의 몸으로 터득함으로 알게 되는 지혜를 중시해왔고,

심지어 '고타마(붓다)'의 가르침에 귀의하지도 않았다.


이는 곧 그가 세상의 말, 대세에 휩쓸리지 않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는 본격적인 사마나의 길을 가기 전부터 제행무상, 곧 만물이 변화함을 알고 있었고

그 온갖 변화를 몸소 겪으면서 비로소 제법무아, 자아가 허상이라는 '깨달음'에 도달한 것인지 모른다.



정녕 세상에서 대세라 알려진 가르침은 변치 않는 진실인 것인가?


진실을 구한다는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우리는 모두 구도자다.


진실의 씨가 내재되어 있기에, 그 씨가 발아할 수 있는 상황을 만나길 바라는 것이다.


그렇게 진실의 씨가 발아한다면 우리는 진실의 나무, 붓다가 될 것이며

그게 우리가 이 생에서 도달해야 할 최종 목적지가 될 것이다.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를 읽는 사람마다 자신 안의 붓다,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존재를 발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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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환 |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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