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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연극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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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심 Jun 23. 2021

'절대'라는 말

2020.06.16

3월부터 수요일마다 고교학점제 교육과정으로 연극 제작실습 수업을 진행해 왔다.


아이들에게 연극은 낯설고 쑥스럽고 어색한 몸짓이란 걸 알기 때문에 연극 수업이 폐강이 될까 싶어 교실을 순회하며 영업(?)을 해서 아이들을 모집했다. 강좌를 개설한 후에는 정규 수업을 마치고 10시까지 학교에 남아 연극 수업을 진행했다. 6월 16일은 연극 제작 실습수업 발표회 날이었다. 발표회는 장진의 서툰 사람들을 도서관 무대에서 낭독극으로 준비했다. 나의 부탁을 받은 민 음악은 기꺼이 창고를 뒤져 보면대를 찾아 주었고 교무실무사는 대본을 복사해서 스프링 제본까지 하는 번거로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배우들에게 밋밋한 형광등보다 무대에서 자신만을 비추는 조명을 비춰주고 싶어  인근 극단에서 조명도 일찌감치 부탁해뒀다.


그러나 발표회 당일 고심 끝에  발표회를 엎.었.다. ( '차라리'라는 부사를 넣어야만 속상함이 덜 할 것 같다.)

'받은 잔은 마땅히 참고 비워야 한다'는 이문열의 소설 속 구절을 좋아한다. 참담하게 실패할 지라도 가까이 가서 부딪치기라도 하는 편에 마음이 기운다. 실패도 스펙이 되는 세상 아닌가?


그렇지만 발표회 날 주연배우 J의 불참 통보는 내가 마땅히 참는다고 달라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J는 발표회와 첫 알바 출근이 겹쳐서 참석할 수 없다고 했다. 학교에 있다 보면 -나의 입장에서 - '도대체' 이해할 수 없고 ' 말도 안 돼'는 여러 상황을 자주 마주한다. 곤혹스러운 상황을 수습해야 하는 난처함보다 나만 혼자 아이들을 좋아했던가 싶어 얼얼한 뒤통수를 문지를 때의 속상함이 더 힘들다. 교사와 학생 사이에 이런 말이 어울릴지 모르겠지만 '배신감'마저 든다.


 J가 연신 죄송하다고 말할 때  마음속으로 '어떻게 주연이 발표회에 불참할 수 있니? 말도 안 돼!"라며 J를 원망했다. J 외에도  K는 미리 계획된 가족여행이라 자기 혼자만 가족여행에 안 갈 수 없어 발표회 얼마 전에 불참을 알려왔었다.  K의 공백은 다른 배우에게 배역 하나를 더 얹어주던가 목소리 연기로 대체할 수 있는 배역이라 별 걱정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J는 대체 불가한 주연급이다.


예정된 발표회를 강행하기 위해 여러 방안을 궁리했다. 두 학생의 불참 소식을 듣자마자 발표회 참관을 오기로 한 장학사가 먼저 떠올랐다. 어그러진 공연을 본다면 힘들게 꾸려온 시간과 열정이 부정당할 것이다.


-지난달에 전학 온 B가 연극제에서 상을 받았다고 하던데 어차피 낭독극이니까 B라도 급하게 세워볼까?

-내가 엄마 역할을 하고 목소리를 하나 더 넣어 볼까?


아무리 여러 상황을 조합해도 주연이 빠진 공연은 여기저기 덧대고 기운 옷처럼 볼품없었다.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채 장학사에게 성과물처럼 보여주기 식 거짓 공연이 의미가 있을까? 솔직하게 사정을 말씀드리고  정규 수업 종강을 하고 발표회는 7월로 미뤘다. 아이들에게 연극은 오래 기억되고 빛나는 기억으로 남게 하고 싶었다. 대부분 첫 연극인 아이들을 이리저리 기운 누더기 공연에 세우게 하고 싶지 않은 이유기도.   


'세상에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없어! 내가 이해 못할 뿐이야'


일터에서 나와는 한참 어긋나 있는 동료와 부딪치기 싫어 외면해 버린 적이 있다. 낮에 있었던 억울함을 잠들기 전에 복기하다 생각이 생각을 낳아 분함이 너무 커져서 밤을 새운 적도 있다. 오늘처럼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도 나라면... 그럴 수 없다'는 답을 내는 날은 역지사지도 소용없었다. 사람과 사람이 마음 부대끼며 살다 보면 때론 내가 비루 해지도 남이 징그러워지기도 하면서 살아진다.


그럴 때 '세상에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없어! 내가 이해 못할 뿐이야'라는 차가운 다독임은 경험상으로 꽤 효과가 좋은 편이다. '절대'라는 말을 잠시 밀쳐내면 병아리 눈물만큼이지만 쪼금 더 마음이 수굿해진다.


'절대'라는 부사는 엄정하다.  용서, 이해와 같은 단어와 함께 쓸 때 더 조심스러워져야 하는 이유다. '절대'는 물러설 수  없음이고 용서할 수 없음이다. 그런 이유로 '절대'는 '한번 더'라든가 '혹시'라는 여지를 허용하지 않는다.


'절대' 이해 못할 것 같던 동료의 이기적 행동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시간이 지난 후에 그 만의 '고유한' 습이거나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음을 알 때가 있다. 생각해보니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란 것들도 나만의 잣대로 가늠해 옳고 그름으로 편을 갈라놓고 저 혼자 어금니를 물때도 있다.   


나중에 전해 들은 J의 사정은 이랬다. J는 처음으로 아르바이트 면접을 보러 갔다고 했다. 시급을 좀 더 주는 유명 햄버거 체인점이라고 했다.  너무 떨려서 16일부터 출근하라는 사장의 말에 하필 그날이 발표회 날인 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뒤늦게 알았더라도 어렵게 구한 알바자리를 놓치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던  발표회를 미룬 지 일주일이 지났다. J는 자신의 이유가 있었고 난 나의 이유가 있었다. 그게 다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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