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2. 비 오는 날의 쓸쓸함을 채워주는 된장 수제비 한 그릇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사람 사는 이야기를 하는 것만큼 위로가 되는 순간도 없습니다. 바쁘고 지친 일상 속에서 온전한 끼니조차 챙길 수 없는 당신에게. 매주 금요일 소소한 한 끼를 들려드릴게요.
인생, 음식. 소소한 이야기 한 그릇.
예년보다 장마가 빨리 찾아와서 그만큼 일찍 끝나겠거니 했는데, 오히려 길어지고 있어서 괜히 습한 날씨 탓을 하게 되는 요즘입니다. 그래도 장마 뒤 찾아올 무더위와 열대야를 생각하면 오락가락하더라도 지금이 나을 것 같기도 한데, 이건 제가 비를 그리 싫어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아요. 물론 신발이 엉망이 되고, 양말이 젖어 하루 종일 축축한 건 정말 싫지만.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나, 눅눅한 공기 속에 차분해지는 기분은 제법 마음에 들거든요.
비가 오던 며칠 전 인생 음식을 함께 만들고 있는 PD와 밥을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됐어요. ‘비’에 대한 기억이나 느낌은 전혀 다르더라고요. 그래서 오늘은 인생 음식 PD의 비 내리는 날 떠오르는 기억 한편에 있는 ‘된장 수제비’를 만들어보려고 합니다.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집에 돌아가려는데, 그날따라 비가 꽤 내렸습니다. 우산이 없었지만 집이 가까워 그냥 걸어가기로 했어요. 자취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우산을 가져다 줄 가족들이 없다는 게 와 닿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열심히 뛰었지만 그래도 비를 피할 수는 없었고, 온통 젖은 채로 현관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집으로 발을 들여놓는 그 순간 일을 하며 쌓였던 하루의 고단함, 그리고 아무도 없는 집의 허전함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그런데 그 상황에서 왜 그렇게 배는 고픈지. 젖은 옷을 갈아입고 냉장고를 열었는데, 당장 먹을 게 없는 건 둘째치고 변변한 재료조차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때, 엄마가 정말 많이 보고 싶더라고요. 이런 시간이 찾아오면 그 쓸쓸함 속에서 ‘내가 가족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었구나.’라는 걸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쓸쓸한 건 쓸쓸한 거고, 아무리 재료가 없어도 허기는 채워야 하는데 그때 눈에 들어온 게 바로 된장과 밀가루였어요. 밥솥도 없었던 때라 할 수 있는 게 많지도 않았거든요. 다른 채소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반죽을 시작하고 된장을 풀어 수제비 한 그릇을 뚝딱 만들어냈습니다. 그렇게 만든 수제비를 먹으니 그제야 비 맞은 몸이 좀 풀리는 기분이 들었어요.
들어간 건 없지만 그래도 제법 맛이 나는 수제비를 먹으면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저 독립을 했다고 해서 어른이 된 건 아니라는 거요. 하루의 고단함과 쓸쓸함 속에서 된장 수제비 한 그릇을 만들어내는 제 자신을 보며 언제나 엄마의 그늘에 있었던 모습이 스쳐 지나갔거든요. 이제는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해나가야 하는 거잖아요. 물론 저는 여전히 서툴지만 하나씩 제 손으로 모든 것을 해나가고 그 속에서 조금씩 어른이 되어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재료: 밀가루, 멸치육수 팩, 감자 1개, 양파 1/2개, 홍고추 1, 청양고추 1, 대파, 애호박 1/3개, 된장 2큰술, 다진 마늘 반 큰 술, 액젓 2큰술
1. 밀가루에 물을 부어 반죽을 한다. 되거나 질면 밀가루나 물을 더 넣으며 반죽한다. 반죽은 냉장고에 넣어 잠시 숙성시킨다.
2. 멸치육수 팩을 넣고 육수를 먼저 끓여준다.
3. 육수가 우러나는 동안 채소를 손질한다.
4. 물이 끓으면 멸치육수 팩을 건져내고 된장, 다진 마늘, 액젓을 넣어 간을 한다.
5. 감자를 먼저 넣고 반죽을 손으로 떼어 넣는다.
6. 나머지 야채를 모두 넣고 푹 끓인다.
-재료: 호박 2/3개, 달걀 2개, 밀가루 조금, 홍고추 조금
1. 호박을 썰어두고 소금으로 간을 해 두고, 달걀을 풀어둔다.
2. 밀가루를 먼저 묻히고, 달걀물을 묻힌다.
3. 고명으로 올릴 홍고추를 잘게 썰어둔다.
4. 프라이팬에 기름을 넉넉히 두르고 호박을 부쳐낸다.
어른이 된다는 게 생각했던 것보다 멋진 일만 가득하진 않다는 걸 깨닫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다사다난함을 이겨내고 견뎌내야 한다는 걸 알았고, 저도 겪고 있는 중이거든요. 사실 그래서 저도 잘 모르겠어요. 어른이 되는 과정이 이렇게 힘든 게 맞는 건지, 또 이걸 겪어내면 무언가가 있는 게 맞는 건지.
텅 비어버린 냉장고 조차 쓸쓸함을 잔뜩 안겨줬지만, 그래도 그 속에서 된장 수제비 한 그릇이 주는 위로를 찾아냈잖아요. 모든 것을 스스로 해나가야 하는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묵묵하게 사랑으로 뒤를 지켜주시는 가족들이 있다면, 조금 더 천천히 어른이 되어도 괜찮지 않을까요?
오늘 저녁, 뜨끈한 된장 수제비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