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설뺑이를 치다가

by 브라이언

제설만큼 잔인한게 없다.

눈길 위에 제설제를 잔뜩 들이부으면 빙판이 깨지며 비명을 내지른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조그맣게 들리는 “틱, 틱” 소리는,

마치 좀비영화에서 썩은 몸뚱이들 사이에 파묻힌 히로인의 마지막 대사처럼 절절하고 끔찍하다.

밤의 고요 속에서 평화로이 쌓인 순진무구한 눈송이들은 제설제의 인공적인 무지막지함 앞에서 죽어간다.

환공포증을 유발하는 모습으로, 검게 더럽혀지며…


나는 내가 봤던 첫눈의 기억을 간직하고있다.

내가 다섯 살이었을 때 - 그 이전에도 봤기야 했겠지만 인간이라고 부르기 애매할 수준의 의식을 지녔었기에 논외로 치자면 - 한겨울에 눈이 내렸다.

싸리눈이었다.

아무리 내려도 잠시 머물렀다 이내 사라지는, 그런 안쓰러운 눈.

그럼에도 나는 마냥 신났었다.

어린 나의 5년 인생 중, 집 앞 콘크리트 블록들의

색깔은 무뚝뚝한 회색이었는데, 온 세상이 희끗희끗해지다니!

당시의 내게는 적잖은 충격이었다.

나는 내가 아끼던 흰색 패딩을 입고 아빠와 집 앞 놀이터에서 조그마한 손으로 열심히 눈사람을 만들었다.

그렇게 태어난 눈사람은 집 앞 화단의 높이보다 키가 작은, 사람보단 조랭이떡에 가까운 형상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조악하고 나약할지언정,

당시에는 나뭇가지로 만든 부실한 눈코입과 가느다란 팔을 바라보며 형언불가한 수준의 뿌듯함을 느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약 20년이 지난 지금,

나는 아직도 눈이 내리면 눈사람을 만들고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엊그제 내렸던 올해의 첫눈을 보면서도,

나는 흰 눈 위에 조랭이떡 눈사람의 나무로 만들어진 웃음을 그렸다.

하늘이 그동안 참아왔다고 티를 내려는지 두꺼운 눈송이들을 펑펑 쏟아내자, 온 세상은 빠르게 순수해졌다.

애처럼 신이 났다.

”우와” 소리가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조금씩 쌓여가는 눈을 보며, 어떻게 저렇게까지 새하얀게 존재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년 눈이 내릴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연말과 첫눈의 멜랑콜리도 잠시,

나는 제설 작업을 나가게 되었고, 잔뜩 들떠있던 나의 마음은 빠르게 가라앉았다.

몸이 힘들어서가 아니다.

눈을 치우기가 싫었다.

곱게 펴져있는 이 순수함을 내가 어떻게 감히 훼손한다는 말인가.

내가 뭐라고..

그저 마냥 흰 눈 양탄자 위에 누워 밤하늘을 바라보며 멍을 때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준상이형, 승원이형과 함께했던 북해도 여행의 기억이 나도 모르게 재생되었다.

한참 케이블카를 타고 도착한 아사히산의 정상에는 눈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가슴 높이까지 쌓인 눈 속에서 우리 셋은 하염없이 돌아다녔다.

걷다가 서고, 서있다 앉고, 앉다가 눕고.

누워서는 괜히 팔다리를 휘적거리며 뽀득거리는 소리를 쉴 새 없이 내기도 했다.

입김이 얼어붙고 손발엔 감각이 없었지만, 난 살면서 그보다 신난 적이 몇 번 없었다.

그곳에서의 제설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단어였다.

오히려 인간의 오만함과 무지함을 자랑하는, 어처구니없는 행위였다.

흰 하늘과 흰 땅 사이에 누워 멍을 때리며, 나는 내가 얼마나 작은지 뼈시리게 체감했다.


그런 생각들을 하며 넉가래로 눈을 퍼나르니, 이 얼마나 모순적인 상황인지 헛웃음이 나오더라.

나는 눈을 치우기 싫다.

그냥 있는 그대로 두고싶다.

그래서 나중에 늙어서는 평평한 곳에서 살고싶다.

겨울마다 새하얀 지평선을 볼 수 있다면, 난 그걸로 족하다.

늙은 나 또한 변함없이 조랭이떡 눈사람을 떠올리며,

그의 삐뚤빼뚤한 미소를 눈밭에 그리고 있었으면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로만과의 대화